안녕하세요, 저는 레르입니다. 대충 비건 지향 레즈비언이고, 대학 진학을 준비하고 있어요. 저는 ‘학교밖청소년(이하 학밖청)’ 중에서도 좀 특이한 부류에 속합니다. 보통 ‘학밖청’이라고 하면 자퇴를 떠올리지만, 저는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에 가지 않은 ‘고등학교 비진학자’이거든요. ‘자퇴생’에 비해 덜 알려졌고 복잡한 개념이라 설명하기 귀찮기도 해요. 고교 비진학자. 입에 잘 안 붙기도 하고요.
사회가 정해준 공동체
학교라는 곳은 여러모로 비건 지향 퀴어 청소년이 지내기 어려운 곳입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볼게요. 저 같은 경우에는 중학교에서의 3년을‘착한 여자아이’로 지냈습니다. 안경 끼고, 머리를 묶고 다니며, 쉬는 시간에는 책을 읽고 숙제하는, 그런 아이요. 모든 인간이 본능적으로 그렇듯이, 저는 남들과 달라 보이는 게 두려웠습니다. 그런 제가 중학교 3학년이 되어 비건 지향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그 두려움은 처음에 얼마나 심해졌는지. 일화 하나가 떠오르네요.
학교 급식엔 동물성 음식이 아예 없는 비건식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대신 먹으려고 빵을 하나 들고 간 적이 있어요. 사실 그거 먹으려고 급식실까지 갈 필요는 없는데, 학교가 급식을 안 받아도 억지로 줄을 서게 하더라고요. 그렇게 모두가 있는 곳에 서서, 혼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차례가 끝나길 기다리고, 결국 자리에 앉아서 가방을 열고 먹기 시작했는데요, 살면서 그렇게까지 제자리에서 벗어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나 싶어요.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도 모두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고, 여기에 있으면 안 될 것 같고. 그렇게 느낄 이유는 없는데 말이죠. 지금 보면 그냥 급식실에 안 가면 됐을 일이지만, 그것도 평범에서 벗어나는 일이니까요. 이후로는 절대로 뭔가를 챙겨가려고 하지 않고, 급식 메뉴 중에 그나마 채식에 가까운 것들을 걸러 먹으려고 했어요.
학교에서 나오고 나서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학교 밖 청소년센터’에 꽤 열심히 다녔던 기억이 있네요. 제가 아는 기관으로는 전국에서 운영하는 ‘꿈드림센터’ 그리고 서울에서만 운영하는 ‘친구랑’이 있는데요, 가르쳐주시는 분들도 함께 수업을 듣는 분들도 모두 좋은 사람이었고, 내용도 꽤 유용했어요. 하지만 거기서도 여전히 가르치는 어른들과 듣는 아이들의 이분법 안에 갇히게 된다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성소수자이자 채식인으로서 여전히 모두로부터 붕 뜨는 느낌이 들었어요.
또 어떤 시설이든지 저는 그저 저에게 필요한 것만 얻고 나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것이 물리적인 지원이든, 정신적인 지식이든 말이죠. 공동체와 연결된다는 느낌은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학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거기 있는 모두의 잘못은 아니에요. 이런 게 시설의 한계일 뿐인 거죠.
쓰다 보니 생각이 납니다. 정신적으로 좀 힘든 시절이었어요. 당시 혼자 정신과를 알아보려고 했지만, 부모와 함께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많았습니다. 인터넷에 검색해 봐도 관련된 정보는 찾기 어려웠어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꿈드림센터’에 갔습니다. 물론 저를 친절하게 받아주셨지만, 심리상담은 가능해도 의학적 진료 같은 도움을 줄 수 없다고 해서 답답했어요. 눈물만 잔뜩 흘린 채, 엉망이 된 얼굴로 나와서 다시는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학밖청’에게 필요한 것을 지원해 줘야 할 기관에 어떻게 이리 중요한 정보가 하나도 없을 수 있는 건가 싶어 실망했어요.
나와 무지개교실
‘무지개교실(이하 무교)’이 어딘지 간략히 소개해 보자면, 학교 밖 성소수자가 공부할 수 있는 곳이에요. 현재 1기가 끝나긴 했지만, 당시에는 매주 월, 수요일에 만나 검정고시 관련 수업을 듣고 금요일에는 교양수업을 들었어요. ‘교실’이긴 하지만, 어떤 한 장소에 국한되지는 않습니다. 만남의 장소로 사용되는 사무실에 갈 수 없을 때는 카페에 모여서 자습하기도 하거든요. 저는 그저‘무교 만남이다!’라고 말하면 그게 무교라는 생각이 들어요. 무지개교실은 서로를 부르는 호칭까지 달라요. 무교에서는 선생님, 학생 대신 탱이(담탱이)/쟁이(~쟁이, 무언가를 하는 사람)라고 불러요. 인터넷에 검색해서 찾아보시는 건 어떨까 제안합니다. 그저 몇 문장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곳이거든요.
무교 인원을 모집하는 글은 보자마자 굉장히 끌렸어요. 당시의 저는 띵가띵가 놀고 있는 녀석이긴 했지만, 언제나 다시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을 한켠에 가지고 있었거든요. 인터넷에서 학밖청들을 위한 공부 모임을 봐도, ‘그래봤자 집에서 인강 보고 문제집 푸는 편이 훨씬 효율적인걸’ 같은 생각을 하면서 무시했어요. 그런데‘성소수자’ 학밖청 모임은 정말 처음 들어봤거든요. 게다가 밥까지 준다고 하더라고요. 신청서의‘기타 사항’ 예시에‘비건식을 합니다’가 쓰여 있어서‘와 여기 비건도 배려해 주는 건가?!’하며 흥분했던 기억이 있네요.
신청할까 말까 오래 고민했어요. 상당히 부끄러울 정도요. 첫 번째는‘이런 걸 운영하는 곳이라면 분명히 번쩍번쩍하고 인기 많은 곳임이 분명해! 신청하고 떨어지면 어떡해…’라고 생각해서였는데, 나중에 탱이님들이 말씀하시길 전혀 그렇지 않다고, 사람들이 안 오면 어떡하나 다들 빌고 계셨다고 하셨어요. 웃기죠. 두 번째는, 당시에는 의식을 못 하고 있었지만, 그때까지 오프라인에서 제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표현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그게 두려웠던 것도 같아요. 하지만 그냥‘퀴어 친구들도 사귀고 밥도 먹자!’ 하는 다짐으로 눈감고 신청했어요.
무지개교실은 오리엔테이션부터 달랐어요. 피피티를 보면서 와, 이 사람들 정말 여기에 신경을 많이 썼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내가 중간에 갑자기 끼어들어서 저기 맞춤법이 틀렸다고 해도 될 것 같은, 비판을 받아들일 분위기인 것도 좋았고요. 실제로 피드백하면 바로 받아주셨고요. 뒤풀이로 식사하며 수다를 떠는데 누군가와 그렇게 앉아서 내 솔직한 생각을 드러낼 수 있었던 건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즐거웠어요.
무교의 정규 수업 과정도 꽤 즐거웠어요! 학교에서도 그렇듯이 수업을 듣는 것이 전부 재밌기만 한 것은 아니죠. 하지만 권위에 눌려 질문하거나 반항하기 힘든 학교의 수업과 다르게 괴상한 질문을 마구 던져도 되고, 오히려 탱이분들이 답이 정해지지 않은 철학적인 질문을 막 던져주시고, 서로 욕설을 막 해도 되고. 탱이분들이 전부 퀴어 당사자라 그런지 예시로 쓰이는 자료도 공감하기 쉬운 녀석들이고. 아, 이런 게 정말 수평적인 교육이다, 하는 것을 느꼈어요. 죄송하게도 실제 배운 것 중 기억나는 것은 많이 없지만, 이런 분위기가 정말 즐거웠다는 것은 기억해요. 수업 시간 중에 말 안 하고 편하게 화장실에 다녀올 수도 있고, 점심시간에는 항상 각자 먹고 싶은 음식을 고를 수 있고. 그런 자유로운 분위기가 너무 좋았어요.
무지개교실에서 있었던 일 중에 저는 떡국 파티가 기억에 남아요. 채식인으로서 명절에 가족과 하나 됨을 느끼기가 항상 어려웠어요. 그런데 무교에서 같이 모여 설날 모임 이야기를 하는데, 원래는 배달시키려 했지만, 그러면 전부 논비건이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사실 모임에 참여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어요. 집에서 쉬고 싶었거든요. 저 때문에 고생하시는 것 같아서 그냥 제가 빠질 테니 편하게 하시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오히려‘무슨 말을 하는 거냐’라고 꾸중을 들었어요. 그때‘아, 이 사람들은 진짜 나를 생각해주는구나’ 좀 감동했어요. 생각해 보세요. 학교가 아무런 정책이나 압력 없이도, 그저 한 사람의 신념을 위해 비건 급식을 내줄까요? 못하죠. 그런데 무교에서는 인원 중에 비건 지향인이 저 하나뿐일 때도 항상 비건 옵션 있는 식당을 알아봐 줘요. 이런 대접이 솔직히 조금 부담스러울 때도 있어요. 하지만 그러면서 또 감사하죠. 그냥 평소에 이런 대접을 받을 일이 없어서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이게 제가 정당히 받아야 할 취급이라고 해도 말이죠. 당일에는 먹을 것 걱정 없이 그냥 이것저것 떠들고 재밌었어요. 그렇게까지 하나가 된 것 같은 편안함은 오랜만이었어요.
학밖청 스테레오 타입을 생각해 보면, ‘담배 피우고 술 마시고 다니는 양아치, 아니면 집에서 게임만 하는 히키코모리’ 정도인데요. 저는 학밖청 당사자니까 당연히“학밖청들 그런 거 아니고 다들 자신의 방향대로 잘 산다.” 이렇게 말하고 싶죠. 그런데 제가 무교에 들어오기 전에는 히키코모리였거든요. 그래서 할 말이 없었어요. 당시에는 정말 미래가 없는 인간처럼 살았어요. 하루 종일 게임만 하고 유튜브 보고. 그런 생활을 벗어나려고 무교를 신청한 것도 있어요. 정말 ‘얼굴 보고 만나서’ 밥 먹는 거라고 했으니까. ‘아, 이거라면 집에서 좀 나올 계기가 되지 않을까?’ 했어요. 학밖청 3년 차로서 이것저것 무료 수업 신청해 본 게 많아요. 그런데 결국에는 항상 반쯤 하다가 그만둬요. 나가는 게 힘들고, 사람들과 함께하는 게 힘들고, 의욕이 생기지 않으니까요. 그럴 때마다 자괴감이 생겼죠. 그래서 이게 내 마지막 기회다, 하는 다짐으로 무교는 최대한 열심히 나갔어요.
하지만 무교가 저를 집에서 꺼내줬다, 이렇게만 말하는 건 엄청난 축소라고 생각해요. 무교는 저의 미래에 대한 생각까지 바꾸는 계기가 되어주었거든요. 무교 막 신청할 때만 해도 대학 진학은 제게 막연하게 다가왔어요. ‘검정고시 점수는 있으니까, 지방대든 뭐든 일단 들어가면 상관없지’ 하는 마인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탱이 한 분이 논술 전형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한다는 거예요. 말했다시피 대학에 조금 회의적이어서 들을까 말까 고민했어요. 하지만 어차피 하는 일도 없으니 그냥 듣기로 했죠. 근데 정말 열정적으로 설명하시더라고요. 듣고 나니까‘그래도 사람들이 이름 들어본 대학교 정도는 가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그 이후 다른 쟁이분들과 함께 논술 과외 수업을 들었고, 지금은 논술 학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이제 정말로 열심히 노력해서 좀 괜찮은 대학교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논술에 필요하다고 하길래 수능 특강까지 풀고 있고, 무교에 계신 모든 분이 제 친지들보다 절 대학 보내는 데에 열정적이세요. 제가 어떤 사건을 기억할 때 ‘과연 10년 뒤에 내가 이것을 기억할까?’를 기준으로 중요도를 매기는데요, 무교에 대한 기억은 중년이 되어도 남을 것 같아요.
무지개교실의 존재 의미
학밖청들이 모두 저처럼 집에 갇혀 지내던 것은 아니고 그 사실을 알리는 것도 중요해요. 하지만 학교를 다니는 사람들보다 그렇게 되기 쉽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학교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공동체를 만드는 데에는 꽤 효과적이니까요. 학밖청을 위해 교육청과 같은 기관에서 만드는 공동체도 일부 존재하지만, 학밖청이라는 소수자를 위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의 다양성에 대한 포용은 부족하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곳에서는 나 자신을 다른 존재로 가장하지 않으면 그 일부가 될 수 없어요. 결국 지친 존재들은 그곳에서 떨어져 나가 혼자가 될 수밖에 없죠. 때문에 무지개교실같이 모든 존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곳이 필요해요.
무지개교실은 제가 정말 저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느끼게 해준 곳입니다. 내 외로움이 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줬거든요. 무지개교실이 청소년 공동체의 지향점이 되면 좋겠어요. 무지개교실은 제게 유토피아 같은‘학교’예요. 이상적인 학교는 이런 모습이야! 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죠. 정말 너무 좋아서, 전 세계의 모든 학교가 이랬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그럴 일이 없겠죠. 그런 의미에서 제가 무교를 만난 건 기적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기적에 감사하는 것보다는, 이런 경험이 더 이상 기적이 아닐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힘들면 아니 그저 귀찮다면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해주는 곳. 그러다 돌아오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날 받아들여 주는 곳. 내가 이런 존재라고 말하면 그렇다고 해주는 곳. 무교가 아니었다면 저는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하기 어려워요. 이 기회를 빌려 내 미래를 바꾸어준 무지개교실에 감사를 표현하고 싶네요.
사랑할 수 있는 학교, 여기 존재해요.
[심사위원 작품평] 심사위원들은 '무지개 교실'이라는 장소를 통해, 희망이 닫힌 문 뒤가 아니라 활짝 열린 문 안에 있음을 전해준 '레르'님의 글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심사위원 김현 |
안녕하세요, 저는 레르입니다. 대충 비건 지향 레즈비언이고, 대학 진학을 준비하고 있어요. 저는 ‘학교밖청소년(이하 학밖청)’ 중에서도 좀 특이한 부류에 속합니다. 보통 ‘학밖청’이라고 하면 자퇴를 떠올리지만, 저는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에 가지 않은 ‘고등학교 비진학자’이거든요. ‘자퇴생’에 비해 덜 알려졌고 복잡한 개념이라 설명하기 귀찮기도 해요. 고교 비진학자. 입에 잘 안 붙기도 하고요.
사회가 정해준 공동체
학교라는 곳은 여러모로 비건 지향 퀴어 청소년이 지내기 어려운 곳입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볼게요. 저 같은 경우에는 중학교에서의 3년을‘착한 여자아이’로 지냈습니다. 안경 끼고, 머리를 묶고 다니며, 쉬는 시간에는 책을 읽고 숙제하는, 그런 아이요. 모든 인간이 본능적으로 그렇듯이, 저는 남들과 달라 보이는 게 두려웠습니다. 그런 제가 중학교 3학년이 되어 비건 지향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그 두려움은 처음에 얼마나 심해졌는지. 일화 하나가 떠오르네요.
학교 급식엔 동물성 음식이 아예 없는 비건식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대신 먹으려고 빵을 하나 들고 간 적이 있어요. 사실 그거 먹으려고 급식실까지 갈 필요는 없는데, 학교가 급식을 안 받아도 억지로 줄을 서게 하더라고요. 그렇게 모두가 있는 곳에 서서, 혼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차례가 끝나길 기다리고, 결국 자리에 앉아서 가방을 열고 먹기 시작했는데요, 살면서 그렇게까지 제자리에서 벗어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나 싶어요.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도 모두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고, 여기에 있으면 안 될 것 같고. 그렇게 느낄 이유는 없는데 말이죠. 지금 보면 그냥 급식실에 안 가면 됐을 일이지만, 그것도 평범에서 벗어나는 일이니까요. 이후로는 절대로 뭔가를 챙겨가려고 하지 않고, 급식 메뉴 중에 그나마 채식에 가까운 것들을 걸러 먹으려고 했어요.
학교에서 나오고 나서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학교 밖 청소년센터’에 꽤 열심히 다녔던 기억이 있네요. 제가 아는 기관으로는 전국에서 운영하는 ‘꿈드림센터’ 그리고 서울에서만 운영하는 ‘친구랑’이 있는데요, 가르쳐주시는 분들도 함께 수업을 듣는 분들도 모두 좋은 사람이었고, 내용도 꽤 유용했어요. 하지만 거기서도 여전히 가르치는 어른들과 듣는 아이들의 이분법 안에 갇히게 된다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성소수자이자 채식인으로서 여전히 모두로부터 붕 뜨는 느낌이 들었어요.
또 어떤 시설이든지 저는 그저 저에게 필요한 것만 얻고 나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것이 물리적인 지원이든, 정신적인 지식이든 말이죠. 공동체와 연결된다는 느낌은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학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거기 있는 모두의 잘못은 아니에요. 이런 게 시설의 한계일 뿐인 거죠.
쓰다 보니 생각이 납니다. 정신적으로 좀 힘든 시절이었어요. 당시 혼자 정신과를 알아보려고 했지만, 부모와 함께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많았습니다. 인터넷에 검색해 봐도 관련된 정보는 찾기 어려웠어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꿈드림센터’에 갔습니다. 물론 저를 친절하게 받아주셨지만, 심리상담은 가능해도 의학적 진료 같은 도움을 줄 수 없다고 해서 답답했어요. 눈물만 잔뜩 흘린 채, 엉망이 된 얼굴로 나와서 다시는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학밖청’에게 필요한 것을 지원해 줘야 할 기관에 어떻게 이리 중요한 정보가 하나도 없을 수 있는 건가 싶어 실망했어요.
나와 무지개교실
‘무지개교실(이하 무교)’이 어딘지 간략히 소개해 보자면, 학교 밖 성소수자가 공부할 수 있는 곳이에요. 현재 1기가 끝나긴 했지만, 당시에는 매주 월, 수요일에 만나 검정고시 관련 수업을 듣고 금요일에는 교양수업을 들었어요. ‘교실’이긴 하지만, 어떤 한 장소에 국한되지는 않습니다. 만남의 장소로 사용되는 사무실에 갈 수 없을 때는 카페에 모여서 자습하기도 하거든요. 저는 그저‘무교 만남이다!’라고 말하면 그게 무교라는 생각이 들어요. 무지개교실은 서로를 부르는 호칭까지 달라요. 무교에서는 선생님, 학생 대신 탱이(담탱이)/쟁이(~쟁이, 무언가를 하는 사람)라고 불러요. 인터넷에 검색해서 찾아보시는 건 어떨까 제안합니다. 그저 몇 문장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곳이거든요.
무교 인원을 모집하는 글은 보자마자 굉장히 끌렸어요. 당시의 저는 띵가띵가 놀고 있는 녀석이긴 했지만, 언제나 다시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을 한켠에 가지고 있었거든요. 인터넷에서 학밖청들을 위한 공부 모임을 봐도, ‘그래봤자 집에서 인강 보고 문제집 푸는 편이 훨씬 효율적인걸’ 같은 생각을 하면서 무시했어요. 그런데‘성소수자’ 학밖청 모임은 정말 처음 들어봤거든요. 게다가 밥까지 준다고 하더라고요. 신청서의‘기타 사항’ 예시에‘비건식을 합니다’가 쓰여 있어서‘와 여기 비건도 배려해 주는 건가?!’하며 흥분했던 기억이 있네요.
신청할까 말까 오래 고민했어요. 상당히 부끄러울 정도요. 첫 번째는‘이런 걸 운영하는 곳이라면 분명히 번쩍번쩍하고 인기 많은 곳임이 분명해! 신청하고 떨어지면 어떡해…’라고 생각해서였는데, 나중에 탱이님들이 말씀하시길 전혀 그렇지 않다고, 사람들이 안 오면 어떡하나 다들 빌고 계셨다고 하셨어요. 웃기죠. 두 번째는, 당시에는 의식을 못 하고 있었지만, 그때까지 오프라인에서 제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표현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그게 두려웠던 것도 같아요. 하지만 그냥‘퀴어 친구들도 사귀고 밥도 먹자!’ 하는 다짐으로 눈감고 신청했어요.
무지개교실은 오리엔테이션부터 달랐어요. 피피티를 보면서 와, 이 사람들 정말 여기에 신경을 많이 썼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내가 중간에 갑자기 끼어들어서 저기 맞춤법이 틀렸다고 해도 될 것 같은, 비판을 받아들일 분위기인 것도 좋았고요. 실제로 피드백하면 바로 받아주셨고요. 뒤풀이로 식사하며 수다를 떠는데 누군가와 그렇게 앉아서 내 솔직한 생각을 드러낼 수 있었던 건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즐거웠어요.
무교의 정규 수업 과정도 꽤 즐거웠어요! 학교에서도 그렇듯이 수업을 듣는 것이 전부 재밌기만 한 것은 아니죠. 하지만 권위에 눌려 질문하거나 반항하기 힘든 학교의 수업과 다르게 괴상한 질문을 마구 던져도 되고, 오히려 탱이분들이 답이 정해지지 않은 철학적인 질문을 막 던져주시고, 서로 욕설을 막 해도 되고. 탱이분들이 전부 퀴어 당사자라 그런지 예시로 쓰이는 자료도 공감하기 쉬운 녀석들이고. 아, 이런 게 정말 수평적인 교육이다, 하는 것을 느꼈어요. 죄송하게도 실제 배운 것 중 기억나는 것은 많이 없지만, 이런 분위기가 정말 즐거웠다는 것은 기억해요. 수업 시간 중에 말 안 하고 편하게 화장실에 다녀올 수도 있고, 점심시간에는 항상 각자 먹고 싶은 음식을 고를 수 있고. 그런 자유로운 분위기가 너무 좋았어요.
무지개교실에서 있었던 일 중에 저는 떡국 파티가 기억에 남아요. 채식인으로서 명절에 가족과 하나 됨을 느끼기가 항상 어려웠어요. 그런데 무교에서 같이 모여 설날 모임 이야기를 하는데, 원래는 배달시키려 했지만, 그러면 전부 논비건이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사실 모임에 참여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어요. 집에서 쉬고 싶었거든요. 저 때문에 고생하시는 것 같아서 그냥 제가 빠질 테니 편하게 하시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오히려‘무슨 말을 하는 거냐’라고 꾸중을 들었어요. 그때‘아, 이 사람들은 진짜 나를 생각해주는구나’ 좀 감동했어요. 생각해 보세요. 학교가 아무런 정책이나 압력 없이도, 그저 한 사람의 신념을 위해 비건 급식을 내줄까요? 못하죠. 그런데 무교에서는 인원 중에 비건 지향인이 저 하나뿐일 때도 항상 비건 옵션 있는 식당을 알아봐 줘요. 이런 대접이 솔직히 조금 부담스러울 때도 있어요. 하지만 그러면서 또 감사하죠. 그냥 평소에 이런 대접을 받을 일이 없어서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이게 제가 정당히 받아야 할 취급이라고 해도 말이죠. 당일에는 먹을 것 걱정 없이 그냥 이것저것 떠들고 재밌었어요. 그렇게까지 하나가 된 것 같은 편안함은 오랜만이었어요.
학밖청 스테레오 타입을 생각해 보면, ‘담배 피우고 술 마시고 다니는 양아치, 아니면 집에서 게임만 하는 히키코모리’ 정도인데요. 저는 학밖청 당사자니까 당연히“학밖청들 그런 거 아니고 다들 자신의 방향대로 잘 산다.” 이렇게 말하고 싶죠. 그런데 제가 무교에 들어오기 전에는 히키코모리였거든요. 그래서 할 말이 없었어요. 당시에는 정말 미래가 없는 인간처럼 살았어요. 하루 종일 게임만 하고 유튜브 보고. 그런 생활을 벗어나려고 무교를 신청한 것도 있어요. 정말 ‘얼굴 보고 만나서’ 밥 먹는 거라고 했으니까. ‘아, 이거라면 집에서 좀 나올 계기가 되지 않을까?’ 했어요. 학밖청 3년 차로서 이것저것 무료 수업 신청해 본 게 많아요. 그런데 결국에는 항상 반쯤 하다가 그만둬요. 나가는 게 힘들고, 사람들과 함께하는 게 힘들고, 의욕이 생기지 않으니까요. 그럴 때마다 자괴감이 생겼죠. 그래서 이게 내 마지막 기회다, 하는 다짐으로 무교는 최대한 열심히 나갔어요.
하지만 무교가 저를 집에서 꺼내줬다, 이렇게만 말하는 건 엄청난 축소라고 생각해요. 무교는 저의 미래에 대한 생각까지 바꾸는 계기가 되어주었거든요. 무교 막 신청할 때만 해도 대학 진학은 제게 막연하게 다가왔어요. ‘검정고시 점수는 있으니까, 지방대든 뭐든 일단 들어가면 상관없지’ 하는 마인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탱이 한 분이 논술 전형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한다는 거예요. 말했다시피 대학에 조금 회의적이어서 들을까 말까 고민했어요. 하지만 어차피 하는 일도 없으니 그냥 듣기로 했죠. 근데 정말 열정적으로 설명하시더라고요. 듣고 나니까‘그래도 사람들이 이름 들어본 대학교 정도는 가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그 이후 다른 쟁이분들과 함께 논술 과외 수업을 들었고, 지금은 논술 학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이제 정말로 열심히 노력해서 좀 괜찮은 대학교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논술에 필요하다고 하길래 수능 특강까지 풀고 있고, 무교에 계신 모든 분이 제 친지들보다 절 대학 보내는 데에 열정적이세요. 제가 어떤 사건을 기억할 때 ‘과연 10년 뒤에 내가 이것을 기억할까?’를 기준으로 중요도를 매기는데요, 무교에 대한 기억은 중년이 되어도 남을 것 같아요.
무지개교실의 존재 의미
학밖청들이 모두 저처럼 집에 갇혀 지내던 것은 아니고 그 사실을 알리는 것도 중요해요. 하지만 학교를 다니는 사람들보다 그렇게 되기 쉽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학교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공동체를 만드는 데에는 꽤 효과적이니까요. 학밖청을 위해 교육청과 같은 기관에서 만드는 공동체도 일부 존재하지만, 학밖청이라는 소수자를 위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의 다양성에 대한 포용은 부족하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곳에서는 나 자신을 다른 존재로 가장하지 않으면 그 일부가 될 수 없어요. 결국 지친 존재들은 그곳에서 떨어져 나가 혼자가 될 수밖에 없죠. 때문에 무지개교실같이 모든 존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곳이 필요해요.
무지개교실은 제가 정말 저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느끼게 해준 곳입니다. 내 외로움이 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줬거든요. 무지개교실이 청소년 공동체의 지향점이 되면 좋겠어요. 무지개교실은 제게 유토피아 같은‘학교’예요. 이상적인 학교는 이런 모습이야! 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죠. 정말 너무 좋아서, 전 세계의 모든 학교가 이랬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그럴 일이 없겠죠. 그런 의미에서 제가 무교를 만난 건 기적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기적에 감사하는 것보다는, 이런 경험이 더 이상 기적이 아닐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힘들면 아니 그저 귀찮다면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해주는 곳. 그러다 돌아오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날 받아들여 주는 곳. 내가 이런 존재라고 말하면 그렇다고 해주는 곳. 무교가 아니었다면 저는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하기 어려워요. 이 기회를 빌려 내 미래를 바꾸어준 무지개교실에 감사를 표현하고 싶네요.
사랑할 수 있는 학교, 여기 존재해요.
[심사위원 작품평]
심사위원들은 '무지개 교실'이라는 장소를 통해, 희망이 닫힌 문 뒤가 아니라 활짝 열린 문 안에 있음을 전해준 '레르'님의 글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심사위원 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