띵동 기부는 저에게 ‘과거의 나와 현재의 우리를 이어주는 연결’이에요!” - 기부자 ‘유랑’ 님의 이야기

<띵동 기부자 유랑 님>
🔔안녕하세요, 유랑 님. 잘 지내셨어요? 유랑 님은 띵동 교사네트워크에서도 만나뵈었고, 작년 11월 기부자의 날에도 참여하셨지요.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2022년까지 대안학교에서 근무하면서 대안교육운동을 했습니다. 작년부터 대학원에서 여성학 공부를 하고 있어요. 레즈비언이고요. 학교에서 근무할 때 만난 학생들과 함께 학내 성소수자 당사자모임을 하고 있어요. 모임 이름은 ‘짱똘’이에요. 저는 학교를 퇴사했고 다른 친구들도 대부분 학교를 졸업했는데요, 지금도 정기적으로 만나 놀곤 해요. 최근에는 “우리 같이 뭔가 해보면 좋지 않을까?” 하는 중이고요. 앞으로 청소년 퀴어들과 연결할 수 있을 것들에 관해 즐거운 상상을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대안학교에서 오래 일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퀴어 교사로서 경험한 학교 이야기를 해주신다면요?
🎙️원래 교사가 꿈이었고, 대학을 다니면서 대안교육을 알게 되었어요. 대안교육 안에서는 내가 나를 드러내며 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기대를 하던 시기가 있었고요. 고등학교 때는 학교에 퀴어 친구들이 있었는데, 사범대에 입학하고 나서부터는 ‘정상’의 루트로 지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제 정체성을 숨기고 살았거든요. 그때는 제가 이성애자로 살 수 있다고도 생각했어요. 막상 대안학교에서 일을 시작하고 3년은 커밍아웃을 하지 못한 채 지냈어요. 기숙학교 특성상 일터이자 생활 공간이기도 한 곳에서 제 자신을 숨기다 보니 사람들과 연결이 잘 되지 못했죠. 용기를 내서 교사회에 커밍아웃을 하고 그 다음 학기에 SNS를 통해서 교내에 성소수자 당사자 모임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학생들이 만든 모임의 일원이 되면서 ‘내가(교사가) 두려운 티를 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 짱똘과 진행한 축제 부스에서 ‘나는 레즈비언입니다’라는 팻말을 몸에 붙이는 캠페인에도 함께 하고 그랬어요.

<2022년 청소년퀴어문화축제 '무아지경'에서의 유랑 님>
🔔이제 막 교사회에만 커밍아웃을 한 상태였다면 축제 부스에 참여하는 것에 큰 용기가 필요했겠는데요.
🎙️네, 거기엔 양육자들도 있었으니까요. 이게 저에게 가장 큰 이슈이기도 했어요. 행사가 끝난 주말 저녁이면 양육자 모임이 열리는데요. 모두가 커밍아웃 캠페인에 관한 이야기만 하고 있는 거예요. 저는 담임이라서 거기에 앉아 있었죠. 레즈비언이라는 단어를 처음 듣는 분도 계셨어요. “선생님, 팻말을 붙이고 있던데 뭐라고 적혀 있는 거예요?” 하는 분이요. 레즈비언이 무엇인지 모르는 부모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날이었고, “성소수자는 존중하지만 내 자녀는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발언을 하는 분을 보며 양육자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자녀를 비인가 대안학교에 보내기로 선택한 양육자일지라도 어떤 인식은 닫혀있을 수 있는 거죠.
🔔‘짱똘’ 모임을 만나고 여러 변화가 있었을 것 같아요.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요?
🎙️저는 시스젠더라서 트랜스젠더, 논바이너리, 젠더퀴어가 어떤 고민을 하는지 모르는 때가 있었어요. 제가 청소년일 때에 필요했던 건 저를 지지해줄 수 있는 동료, 친구, 어른이었기 때문에 그 정도 역할로만 ‘짱똘’의 곁에 있었는데요. 제가 있었던 곳이 기숙학교인지라 화장실, 생활관 등등 학교에서 24시간을 온전히 보내야만 하는데 이 공간이 트랜스젠더퀴어에게 어떨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거죠. 그러던 중 짱똘 멤버인 꼬꼬가 3학년 때에 논문 주제로 교내 성중립공간의 필요성을 이야기해줬어요. 그때 저도 처음 알게된 것들이 있었어요. 결과적으로 학교에는 성중립화장실이 만들어졌어요. 섬세한 논의과정을 생략하는 바람에 당사자들이 상처받는 일이 많긴 했지만요.

<교내 성소수자 당사모임 짱똘 그리고 앨라이 친구들과 청소년퀴어문화축제 '무아지경'에서 함께 찍은 사진>
🔔학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셨을텐데요, 띵동을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제가 대구에서 살다가 충북에서 교사 생활을 했는데요. 지역에 쭉 살다보니 성소수자 단체가 있는 지도 모르고 살았어요. 교직생활 3년차였던 2016년에 세월호 2주기 집회에 참가하려 서울 광화문에 갔는데, 거기에서 행성인(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깃발을 처음 봤어요. 저렇게 운동을 하는 단체도 있었구나 싶어 바로 회원가입을 했죠. 띵동은 행성인 뉴스레터를 통해 알게 됐어요. 다른 단체를 소개하는 파트에 띵동에서 후원회원을 늘리는 캠페인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있었거든요.
🔔행성인을 통해 띵동과 연결된 것이군요! 띵동의 기부자가 된 이후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제가 열 두 살 때 친구들과 돌려쓰는 교환일기에 좋아하는 언니 이야기를 쓴 적이 있거든요. 그게 커밍아웃인 줄도 몰랐어요, 친구들도 다 좋아하는 사람 이야기 하길래 저도 똑같이 쓴 거죠! (웃음) 제 차례로 돌아온 일기장에는 충격적인 말들이 써있었어요. 어릴 때 단짝친구에게 부정당한 느낌은 지금도 제 삶에 남아있는 것 같아요. 여전히 그 감각 안에 살고 있으니 청소년 성소수자와 연결되고 싶은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하고요. 그럴 때에 조금만 용기내면 연결될 수 있는 곳이 띵동이에요.
띵동에 후원을 시작한 건 제가 교사회에 커밍아웃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예요. 학교 전체에 커밍아웃을 한다면 학생들과 양육자들이 저를 이전처럼 바라봐줄 지 두려워하던 때이기도 하고요. 청소년 성소수자와 연결되고 싶고 지지하면서 함께하고 싶은데 쉽지 않았어요. 그런데 띵동이 그 역할을 하고 있더라고요. 감사했어요. ‘토토밥’(지금의 ‘띵동식당’) 하는 날이면 학교 학생들에게 알려주기도 했고요.
🔔2017년부터 꾸준히 지켜보신 띵동이 일구어낸 성과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띵동이 법인으로 전환하면서 안정적인 구조를 갖추는 느낌이 있었어요.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겠다는 기대가 들더라고요. 저는 띵동에서 출간하는 보고서의 애독자이기도 해요. <Q로 만드는 울타리>는 교내 성평등위원회 활동을 할 때 교육자료로 썼고요. 최근의 <포용적인 학교 환경을 위한 법제도 개선연구> 같은 것은 청소년 퀴어 관련한 연구를 계획하는 입장에서 힘이 되기도 해요.
🔔사전질문지에는 없던 내용이지만, 문득 묻고 싶어요. 유랑 님의 청소년기에 띵동이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한참을 생각하다) 띵동에 연락은 했을 것 같아요. 열 두살에 친한친구에게 커밍아웃하는 것에 실패하고 이성애자인 척 하고 살았거든요. 스무 살에도 남자와 연애를 시도했고요. 그때 알고 지내던 친구들에게는 작년에서야 커밍아웃을 했어요. 남자를 좋아하는 척 하던 중학생 때에 포털사이트에서 레즈비언 카페를 찾아다녔었는데, 띵동이 있었다면 제가 그때 띵동을 찾아내지 않았을까요. 흔들리던 시절이 단축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때의 유랑 님에게 성소수자는 절대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이렇게 띵동에 연락 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네요. 띵동에게 바라는 것이나 앞으로 외부에서 하고 싶은 활동이 있나요?
🎙️제가 하고 싶은 게 참 많은 사람인데요. 학교에서 근무를 하는 동안에는 하지 못했어요. ‘짱똘’ 친구들과 글을 쓰고 있어요. 책 내려고요. 우리가 학교에서 당사자로서 활동을 하면서 시도했던 것들, 변화가 있었던 것들을 이야기하면서 다른 학교들과 연결되었으면 해요. 퀴어교사모임에서는 현장에서의 활동 사례를 공유하자는 이야기를 활발히 나누고 있어요. 학교에서 여러 시도를 하는 선생님들이 계시거든요. 이러한 사례가 모이면 다른 학교에도 영향을 미치죠. 특히 교장이나 상위 관리자의 반대에 부딪혔을 때 “다른 학교에서도 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고요.
🔔교사분들이 이 인터뷰를 찾아 보실 것 같아요. 현장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분도 있을 지도 모르겠어요. 마음을 돌보고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도록 한 말씀 나눠주신다면요?
🎙️제가 운이 좋았다고는 생각해요. 좋은 타이밍에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다는 사실 자체로요. 동료가 없다고 느껴지는 분이 있다면 학교 밖을 살펴보세요. 제가 학교에 있을 때에는 ‘요새 사회가 힘드니까 바깥도 힘들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밖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띵동 기부자 유랑 님>
🔔동료는 어디에나 있죠. 띵동도 있고요. 이제 마무리를 해보려 합니다. 기부자 인터뷰의 고정 코너, “나(우리)에게 띵동 후원이란 _______ 이다”. 빈 칸을 채워주세요!
🎙️띵동은 “과거의 ‘나’와 현재의 ‘우리’를 이어주는 연결” 이다. 청소년일 때 상처받았던 것이 마치 지금의 나라고 생각하면서 살기도 하잖아요. 사회가 성소수자를 보는 인식도 ‘불행한 삶을 살 것이다’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혼란스러워서 그렇지 다시 생각해봐라’ 이런 식이고요. 그렇지만 우리 삶이 그런 시간만 있지 않더라고요. 과거에 머물러 살 때도 있지만 현재와 연결되어 치유가 될 때도 있고요. 청소년 시절을 떠올릴 때면 현재를 살고 있는 나와 청소년들이 너무 힘들기만 한 삶을 살지 않았으면 해요. 그렇기 때문에 연결될 필요가 있고요. 띵동이 그 연결고리를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마지막 질문이에요. 청소년 성소수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저는 청소년기에 학교나 가족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저를 감추고 살았어요. 그 때의 저는 그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았던 것 같아요. 그건 나의 안전을 지키는 일이기도 했어요. 모든 걸 드러내지는 않아도 괜찮아요. 어떤 환경이든 나를 지키는 게 우선이니까. 그렇지만 나를 없애면서까지 힘들게 살지는 않았으면 해요. 너무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믿으면서 살아갔으면 해요.
유랑 님은 대안학교에서 청소년과 교사가 함께 성소수자 당사자 모임을 했던 경험을 모아 책 출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각 현장에서 적용할 수 있는 좋은 사례들을 기다리며 응원하겠습니다 :)
띵동 기부는 저에게 ‘과거의 나와 현재의 우리를 이어주는 연결’이에요!” - 기부자 ‘유랑’ 님의 이야기
<띵동 기부자 유랑 님>
🔔안녕하세요, 유랑 님. 잘 지내셨어요? 유랑 님은 띵동 교사네트워크에서도 만나뵈었고, 작년 11월 기부자의 날에도 참여하셨지요.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2022년까지 대안학교에서 근무하면서 대안교육운동을 했습니다. 작년부터 대학원에서 여성학 공부를 하고 있어요. 레즈비언이고요. 학교에서 근무할 때 만난 학생들과 함께 학내 성소수자 당사자모임을 하고 있어요. 모임 이름은 ‘짱똘’이에요. 저는 학교를 퇴사했고 다른 친구들도 대부분 학교를 졸업했는데요, 지금도 정기적으로 만나 놀곤 해요. 최근에는 “우리 같이 뭔가 해보면 좋지 않을까?” 하는 중이고요. 앞으로 청소년 퀴어들과 연결할 수 있을 것들에 관해 즐거운 상상을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대안학교에서 오래 일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퀴어 교사로서 경험한 학교 이야기를 해주신다면요?
🎙️원래 교사가 꿈이었고, 대학을 다니면서 대안교육을 알게 되었어요. 대안교육 안에서는 내가 나를 드러내며 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기대를 하던 시기가 있었고요. 고등학교 때는 학교에 퀴어 친구들이 있었는데, 사범대에 입학하고 나서부터는 ‘정상’의 루트로 지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제 정체성을 숨기고 살았거든요. 그때는 제가 이성애자로 살 수 있다고도 생각했어요. 막상 대안학교에서 일을 시작하고 3년은 커밍아웃을 하지 못한 채 지냈어요. 기숙학교 특성상 일터이자 생활 공간이기도 한 곳에서 제 자신을 숨기다 보니 사람들과 연결이 잘 되지 못했죠. 용기를 내서 교사회에 커밍아웃을 하고 그 다음 학기에 SNS를 통해서 교내에 성소수자 당사자 모임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학생들이 만든 모임의 일원이 되면서 ‘내가(교사가) 두려운 티를 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 짱똘과 진행한 축제 부스에서 ‘나는 레즈비언입니다’라는 팻말을 몸에 붙이는 캠페인에도 함께 하고 그랬어요.
<2022년 청소년퀴어문화축제 '무아지경'에서의 유랑 님>
🔔이제 막 교사회에만 커밍아웃을 한 상태였다면 축제 부스에 참여하는 것에 큰 용기가 필요했겠는데요.
🔔‘짱똘’ 모임을 만나고 여러 변화가 있었을 것 같아요.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요?
🎙️저는 시스젠더라서 트랜스젠더, 논바이너리, 젠더퀴어가 어떤 고민을 하는지 모르는 때가 있었어요. 제가 청소년일 때에 필요했던 건 저를 지지해줄 수 있는 동료, 친구, 어른이었기 때문에 그 정도 역할로만 ‘짱똘’의 곁에 있었는데요. 제가 있었던 곳이 기숙학교인지라 화장실, 생활관 등등 학교에서 24시간을 온전히 보내야만 하는데 이 공간이 트랜스젠더퀴어에게 어떨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거죠. 그러던 중 짱똘 멤버인 꼬꼬가 3학년 때에 논문 주제로 교내 성중립공간의 필요성을 이야기해줬어요. 그때 저도 처음 알게된 것들이 있었어요. 결과적으로 학교에는 성중립화장실이 만들어졌어요. 섬세한 논의과정을 생략하는 바람에 당사자들이 상처받는 일이 많긴 했지만요.
<교내 성소수자 당사모임 짱똘 그리고 앨라이 친구들과 청소년퀴어문화축제 '무아지경'에서 함께 찍은 사진>
🔔학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셨을텐데요, 띵동을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제가 대구에서 살다가 충북에서 교사 생활을 했는데요. 지역에 쭉 살다보니 성소수자 단체가 있는 지도 모르고 살았어요. 교직생활 3년차였던 2016년에 세월호 2주기 집회에 참가하려 서울 광화문에 갔는데, 거기에서 행성인(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깃발을 처음 봤어요. 저렇게 운동을 하는 단체도 있었구나 싶어 바로 회원가입을 했죠. 띵동은 행성인 뉴스레터를 통해 알게 됐어요. 다른 단체를 소개하는 파트에 띵동에서 후원회원을 늘리는 캠페인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있었거든요.
🔔행성인을 통해 띵동과 연결된 것이군요! 띵동의 기부자가 된 이후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제가 열 두 살 때 친구들과 돌려쓰는 교환일기에 좋아하는 언니 이야기를 쓴 적이 있거든요. 그게 커밍아웃인 줄도 몰랐어요, 친구들도 다 좋아하는 사람 이야기 하길래 저도 똑같이 쓴 거죠! (웃음) 제 차례로 돌아온 일기장에는 충격적인 말들이 써있었어요. 어릴 때 단짝친구에게 부정당한 느낌은 지금도 제 삶에 남아있는 것 같아요. 여전히 그 감각 안에 살고 있으니 청소년 성소수자와 연결되고 싶은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하고요. 그럴 때에 조금만 용기내면 연결될 수 있는 곳이 띵동이에요.
띵동에 후원을 시작한 건 제가 교사회에 커밍아웃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예요. 학교 전체에 커밍아웃을 한다면 학생들과 양육자들이 저를 이전처럼 바라봐줄 지 두려워하던 때이기도 하고요. 청소년 성소수자와 연결되고 싶고 지지하면서 함께하고 싶은데 쉽지 않았어요. 그런데 띵동이 그 역할을 하고 있더라고요. 감사했어요. ‘토토밥’(지금의 ‘띵동식당’) 하는 날이면 학교 학생들에게 알려주기도 했고요.
🔔2017년부터 꾸준히 지켜보신 띵동이 일구어낸 성과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사전질문지에는 없던 내용이지만, 문득 묻고 싶어요. 유랑 님의 청소년기에 띵동이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띵동 기부자 유랑 님>
🔔동료는 어디에나 있죠. 띵동도 있고요. 이제 마무리를 해보려 합니다. 기부자 인터뷰의 고정 코너, “나(우리)에게 띵동 후원이란 _______ 이다”. 빈 칸을 채워주세요!
🔔마지막 질문이에요. 청소년 성소수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