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띵동의 상훈이에요 :)
오랜만에 인터뷰로 찾아뵙네요! 이번 인터뷰는 최고로 길었던!! 인터뷰같아요. 인터뷰 주인공은 바로 섬돌향린교회에서 담임목사를 맡고 계시는 임보라 목사님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임보라 목사님을 이렇게 가까이서 대면을 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은 처음이어서 긴장도 되고 설레이기도 했어요. 어렸을 때 교회를 다니다가 교회를 다니지 않게 됐기때문에 나름대로 기대도 품고 목사님을 뵙는데요. 갑작스런 인터뷰 요청에도 흔쾌히 응해주신 임보라목사님과의 인터뷰는 저에게 정말 큰 감명을 안겨주었답니다!
상훈마저 감동한 임보라목사님과의 인터뷰, 지금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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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를 드리는 임보라목사님
상훈 :목사님 자기소개 좀 부탁드릴게요.(웃음)
임보라 : 예, 저는 섬돌향린교회에서 5년 차, 보통 담임 목회라고 그러죠? 목사가 지금 혼자이기도 하고 그래서 담임 목회를 하고 있고요. 그리고 띵동 운영위원회. 사실 올해 제가 욜님한테도 올해에는 그래도 내가 매달 그 운영위원회는 참석을 해야지 하고 있었다고 했지만 결석(웃음) 불가피하게 해서 참 출석률이 별로 좋지 않은 거 같고요.
그리고 뭐, 음… 무지개예수라고요, 2008년에 ‘차별없는세상을위한기독인연대’가 있다면, 그게 현재는 자조모임처럼 운영이 된다면, 이제 원래 ‘차별없는세상을위한기독인연대’가 초창기에 추구했었던 각 뭐, 다양한 교단 배경, 뭐 교회 배경, 이런 기독교인들이 같이 참여해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무지개예수’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상훈 :길게 하셨네요?
임보라 : (웃음) 그러게요, 아유 그쵸. 향린교회에서 제가 10년 정도 부목사로 있었는데, 세월이 흘러흘러 이제 벌써 섬돌향린에서 5년을 보냈으니까 많이 보낸 거죠.
상훈 :그러면 교회와 함께 지낸 시간은 얼마나 되나요?
임보라 : 교회는 제가 처음 교인이 아닌 걸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거는요. 94? 93년? 이에요. 그러니까 꽤 됐죠. 신학교 다니면서 뭐 전도사 하고 뭐… 이후에는 목사 시험 봐서 목사 고시, 뭐 목사 되고 뭐 이런 게 꽤 되네요?(웃음)

스톨(Stole, '영대'라고도 불림)이 둘러진 십자가
멍에를 맨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상훈 :띵동이 처음 시작할 때 ‘레인보우 세이프 스페이스’로 시작했잖아요.
임보라 : 네, 맞아요.
상훈 :제일 처음 모금을 시작할 때부터 띵동과 함께 해주셨다고 했는데, 어떤 인연으로 현재 ‘띵동’이라고 불리는(웃음), 이 청소년 성소수자와 관련된 일에 함께 하시게 되셨나요?
임보라 : 하나의 계기에 전·후 이야기가 있는 거 같은데요. 결정적인 계기 자체는 뭐 띵동의 설립 과정하고도 같이 맞물리는 거 같아요. 지금은 미국으로 돌아가셨는데, 음… 소위 1.5세대라고 이야기하는, 코리안아메리칸(한국계 미국인)이 한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본인이 성장하면서 쭉… 미국의 한인 사회를 경험했을 때 너무 보수적이었다고 이야기하시더라고요. 보통 북미 커뮤니티 같은 데 가면 주말에는 한글학교에도 보내고 또 일요일에는 교회가고 이게 뭐 일상인데, 그 분은 한글을 안 배우셨더라고요. 그만큼 여러 가지 사연이 있었던 거죠. 근데 그 분이 한국에 나와서 일을 하다 보니까 이 한국 사회에서의 LGBT에 대한 건. (웃음) 더 심하면 더 심했지, 어 이런 생각을 하셨던 거 같아요.
그래서 좀 기여할 수 있는 뭔가를 계속 끊임없이 고민을 하셨던 분인데, 테드 제닝스1)의 강연을 계기로 그 분을 만나게 된 거 같아요. 그 분께서 ‘뭔가가 필요하지 않을까?’, ‘커뮤니티에 분명히 필요한데 못하고 있는 게 있지 않을까?’ 고민을 하시면서 펀드레이징을 기획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었어요. 그래서 제가 커뮤니티에 필요한 것을 다 알 수 있지 않으니까 활동가와 이야기를 해보자 제안을 해서 욜님하고 이경님하고 함께 넷이서 만난 거예요. 넷이서 만나가지고 LGBT커뮤니티에 뭐가 필요한지 이야기를 시작을 한 거고요. 그게 계기가 된 거고.
그 전 단계로 청소년과 관련해서는 제가 2008년 초반에 한국, 일본, 재일조선인 이렇게 세 여성신학자 단위가 모여서 프로그램 중에 그 때 당시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활동가 케이님이었나? 성소수자 인권에 대한 이야기가 한 꼭지가 들어 있었어요, 2008년 초에. 근데 이 분이 이야기를 하는데 청소년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근데 저는 그 때로서는 굉장히 그 얘기가 충격적이었던 이었어요. 탈가정을 하거나 탈학교를 했을 때, 또는 이 두 상황을 청소년이 겪는다면 이런 상황에서 10대들이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그야말로 르포 형식으로 전해주신 거였어요. 그 때 제가 향린교회에 있었을 그 때 저희가 여성 인권 소모임이라고 여성신학 책도 읽고 페미니즘 책도 읽고 뭐 퀴어 관련한 것도 공부를 하던 공부 모임이 있었는데 그 강의내용에 대해서 얘기를 했어요. “이런 자리 갔더니 이런 얘기가 있더라, 우리 좀 더 들어보자” 그래서 그 때 당시가 다 너무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그 때 KSCRC,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에 전화를 걸어서 물어봤죠.
그 때에 제가 알기로는 그 KSCRC가 뭐랬냐면, 신촌 공원에서 십대 레즈비언 청소년들을 상담하는 활동을 어느 센터에서 펀딩을 받아가지고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뭘 알아보겠다고 찾아갈 수는 없으니까, 얘기만 통해서 들어보니까 거기도 마찬가지였어요, ‘쉼터가 필요하다’, ‘공간이 필요하다’ 띵동이 직면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때 온갖 어려움이 있잖아요, 법적으로 쉼터를 운영한다든지 뭐 십대들을 어쨌든 데리고 있다든지 하는 거에 대한 어려움들이 있다는 걸 그 때 들었고, 그러면 뭘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는데 그 때 한 채윤씨가 책을 내자는 제안을 해서 ‘하나님과 만난 동성애’라는 책을 냈죠. 책을 내서 그 수익금을 가지고 뭔가 연장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좋겠다. 수익금 일부가 ‘비온뒤무지개재단’으로 들어갔어요.

2016년 퀴어문화축제에서 성찬식을 드리는 임보라목사님
임보라 : 큰 돈 아니더라도. 그렇게 쓰이도록 필자들이 다 인세를 기부하는 형식으로 했었고, 그런 게 전 단계가 있었다면 같은 시기에 향린교회 1층에 ‘향우실’이라고 하는 공간이 있었는데. 그 때 는 동인련이죠? 거기에서 청소년 모임 한창 꾸리고. 청소년 모임 담당을 욜님이 계속 하셨고. 그 땐 토요일에 몇 차례 청소년들 모임이 향우실에서 진행됐었어요, 그 땐 돈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청소년들이 활동하는 모습들을 보기도 했고요. 원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면 그분의 그런 제안으로 넷이 딱 만나가지고(웃음) 이야기를 하는데 결국은 청소년 성소수자와 관련된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죠.
그래서 청소년 활동을 위한 준비 모임이 계속 있었죠. 그리고 그 펀딩을 한다고 그랬을 때 해외 펀딩이 갖는 우려의 지점들이나 고민을 했던 적도 있어요. 말하자면(웃음) 외국의 어떤 자본을 가지고 와서 하는 게 맞는지, 이런 토론들이 내부에서 있었던 거 같고. 그래서 뭐 쉼터 경험이 있었던 분들도 모여서 같이 이야기를 하고. 그 때 차세기연, 섬돌, 열린문공동체, 행성인 이렇게 네 단위가 모여서 계속 회의를 하고 들어보고 또 그 다음에는 뭐 쉼터에서 일하시는 분들이나 복지사 이런 분들도 모셔서 이야기를 들어봤던 사전 단계들이 있었던 거 같아요. 그러다가 그 분이 펀딩을 했고, 펀딩의 제안이 클라라 윤 미국에 계신 클라라 윤 이런 분들하고도 연결이 되니까 훨씬, 그러니까 그분들이 활발하게 해주셨고. 그리고 아시다시피 ‘아름다운 재단’에서 정말 감사하게 삼 년 지원금이 됐고. 그러면서 또 동시에 그런 얘기들이 오가니까 저희 교회 출석하고 계시는 그 저기 구글 상무님, Lois(로이스)님이 구글에서 프로젝트를 제안을 하면 펀딩해주는 제도가 있더라고요? 제가 기억으로는 그 펀딩으로 띵동 공간 마련에 보증금으로 쓰였는데. 이렇게 감사한 손길들이 모아져가지고 시작을 하게 된 거죠. 행성인에서 청소년과 관련해서 꾸준히 활동하려고 애쓴 거 같아요. 그 결실들이 띵동으로 이어진 거 같고. 그리고 현재 띵동의 다양한 활동에서 성소수자 청소년들이 그렇게 좋아한다니까, 뭘 해도. 너무 좋은, 기분 좋은 일이죠.(웃음)
상훈 :띵동 운영위 회의 나오실 때 띵동에서 활동한 내용을 보셨 때 뿌듯하실 거 같기도 하고요.
임보라 : 감동이에요, 사실은. 회의록 자료가 엄청나잖아요. 사실 저희 교회도 운영위원회 한 달에 한 번 하는데 저희도 못지않거든요, 다른 교회에 비하면 야, 우리 자료집 진짜 대단하다, 이러면서 회의를 하는데. 운영위원회 딱 가면 프린트 한 걸 보면서, 아주 자세하게 공유를 해주시잖아요. 되게 감동이고 그 운영위원회의가 끝나고 그 문 밖을 나가는 순간 ‘야 어떻게 해서든지 띵동 모금을 더 해야 하는데, 아 어떡하지?’(웃음) 이런 생각을 하게 하죠. 그 이후로 그렇다고 아주 크게 뭐 기여를 더 아직 하진 못하고 있어도 그래도 운영위원회 참석하고 나면 한 번씩은 그 후원, 모금, 정기후원모집 관련 내용들을 한 번 더 공유하게 되는 의무와 책임감이 막 생기고(웃음). 운영위원회는 그래서 사실은 빠지면 안 되기도 하고 빠지고 싶지 않고, 그런 자리이긴 해요.
상훈 : 띵동 시작하기 이전에도 성소수자들과 관련된 활동들을 하셨잖아요, 성소수자 인권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임보라 : 그냥 어떤 시점이라고 이야기하면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논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그 시기, 돌아보면 관련해서 기독교인이 보통 “성소수자를 어떻게 생각 하냐?” 그러면은 대부분 아마 열이면 열 또는 아홉이 다 부정적으로 생각할 것 같아요. 누구한테 물어봐도. 근데 사실은 별로 이렇다 할 계기가 없었어요, 저는 뭐 부정적으로 그 인식을 갖거나 (그렇지는 않았어요) 근데 차별금지법 때 기독교가 워낙, 난리를 치기 시작을 하니까 그게 너무 의아하기도 했고, 주변에는 젊은 기독인 활동가들이 있었거든요. 기독교 내에서 여러 가지 운동들을 하는 분들이, ‘아니 우리가 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게 아닌데, 왜 다 기독교인들은 다 반대하는 것처럼 이렇게 프레임이 짜지냐, 뭔가 우리가 뭔가 해야 되지 않냐’ 이런 문제제기들도 있었고.
그러면서 그게 2008년 초에 여러 가지 일들이 복합적으로 있었는데요. 1월에 그런 문제 제기 때문에 그 토론회 자리가 꾸려졌고, 차별금지법 제정과 관련해서 찬반 토론이 있었죠. 그래서 찬성 쪽으로 가면 저하고, 지금 향린교회 목회 마무리하시고, 그만 두셨지만 고상균목사 이렇게 둘이 찬성 쪽이고. 반대는 총신대 쪽 반동성애 약간 어떤 신학적인 이론을 이야기해주는 그 두 사람이 있어요. 그 두 사람이 나오고 했었던 게 하나의 계기라면 계기? 아마 그 때 이미 이 것과 관련해서 기독교계에서 목소리를 내는 분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분위기가 자꾸 기독교계에서 몰아가기 시작하는 것들 때문에 사실 다른 여타 교수님들이 반대쪽은 다 교수가 나왔거든요. 찬성하는 우리는(웃음) 약간 어수룩해 보이는 젊은 목사들이 나가서 비교돼 보이는 게 성소수자 진영이 어렵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왜냐면 주장을 펼칠 수 있는 분들이 많이 계시는데. 찬성하는 진영은 그렇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면서 그 초기에 또 뭐가 있었냐면 성소수자 그리스도인 모임이 있었는데 선거 운동 전에 운동 경험이 있는 현숙씨도 왔었고, 가톨릭 교인으로서. 그리고 여러분들이 왔어요. 그 이후로 뭐 잘 뵙기 어려운 분들도 계시고 하긴 하지만 그 분들이 교회에서 어떤 경험을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막 하셨죠. 어떤 분은 “저는 교회에서 차별받은 적이 없는데요.”, “커밍아웃해도 별 일 없었는데요.” 이런 분도 계셨고 반면 어떤 분은 정말 거의 신학자와 다름없이 성서 구절에 대한 반박, 이런 것들을 자기 블로그 같은 곳에 글을 올리셨던 분도 계셨고요. 막 고통스러워 하셨죠, 그런 분들은. 2008년 지나고 2010년에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발의 이런 거 했을 때 기자회견 같은 거 할 때도 딱히 기독교계에서 공적으로 말하기가 좀 다 어려워하는 분위기였어요. 근데 저는 향린교회가 어쨌든 진보적인 교회로 알려져 있고, 또 실제로 그런 진보적인 발언이나 어떤 저의 생각이나 이런 것들을 교회에서 제재 하는 게 아니니까 그런 얘기들을 하는 그런 역할들을 주로 맡았던 거 같아요.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은 우리 사회가 성숙해 나가는 데 사실 굉장히 필요한 일종의 기본법 같다는 생각을 하는데, 기독교인으로 일단은 창피해요. 초기부터 쭉 지나온 저로서는 그냥, 뭐랄까 속수무책으로 당해온 느낌이랄까? 조금 더 뭔가를 했었다면 이게 좀 더 나았을까? 이런 생각도 왜 하는 거 있잖아요. 이렇게 막 프레임을 강력하게 덧씌우고, 덧씌우고 오늘날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이 차별금지법하면 그런 이미 프레임에 일종의 세뇌가 되다 보니까. 차별금지법은 저희 교단 내에서도 일부 사람들이 큰일 나는 줄 알아요.(웃음) ‘반대쪽은 열심히 했나?’ 이런 생각도 들고(웃음) 예. 그런 세월들이 생각이 나네요.
상훈 : 띵동이 만들어지고 삼 년이고 띵동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해서 한 사 년 정도 함께 하셨잖아요. 띵동이 성장하는 과정을 쭉 보면 어떤 느낌이 드세요?
임보라 : 저희 교회에 교인 중의 한 분이, 커뮤니티 활동을 잘 안하시는 분이었는데 근래에(웃음). 아 이게 내가 외면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구나, 이러면서 조금 더 자기가 커뮤니티에 기여할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럴 때 소개를 해드리면 홈페이지에 먼저 가보시는데 본인도 뭔가 자신의 청소년기 때를 많이 생각하게 된다, 하더라고요, 물론 어떤 면에서는 본인이 청소년기를 지날 때보다 현재 띵동에 있는 청소년기가 훨씬 풍요로울 수 있다고는 생각해요.
그러나 띵동이 전국에 하난데(웃음) 그걸 모두 누릴 수도 없는 거고, 서울 아닌 곳에서 성장하고 있는 분들은 참 만나기 어렵잖아요. 그런 걸 생각하면은 아직 가야할 길이 멀고다는 생각도 들고요. 아름다운 재단 심사할 때 은찬님하고 욜님하고 저하고 셋이서 들어갔었는데 맨 마지막에 한 남성분이 “이게 왜 필요하다는 거죠? 성소수자 차별 없는 사회가 오면 현존하는 청소년 기관을 이용할 수 있는데 구지 만들 필요가 있나요?”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 때 저희들이 어떤 이야기를 했냐하면, “예를 들어 미국을 보세요. 미국은 차별금지법과 유사한 법들도 있고 제도도 변화가 하고, 변화하고 있고 그런데 왜 지역마다 이런 센터들이 필요할까요? 여전히 사람들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혐오와 차별과 폭력이 계속 발생한다. 우리는 이거 하나 딱 세우지만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니라 띵동과 유사한 센터의 역할은 계속 필요할 것이다. 아마 더 늘려가야 될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을 나눴던 거 같아요.
임보라 : 여러 가지 쉼터를 통해서 노하우를 띵동이 쌓았듯이, 띵동의 노하우도 누군가 더 각 지역에서 관심 있어 하는 분들, 혹은 우리가 띵동을 처음 시작했었을 때 가졌던 마음이 동하는 사람들이 ‘이거 어떻게 해야 되는데?’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아마 지금도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그렇게 해서 사각지대에 있는 분들하고 이어질 수 있으면 좋겠죠?
그리고 제가 요 얼마 전에도 욜님한테 레인보우키트 반찬 보내주는 거에 대해서 들었어요. 신청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런 손길 하나하나가 필요한 거죠, 어떻게 보면 되게 작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결코 작지 않았던 거 같고. 청소년기 때 이렇게 힘들었던 사람들은 ‘너는 괜찮아, 너 잘하고 있어’ 이렇게 해줄 그런 사람들이 필요할 거예요. 그래서 띵가띵가활동가 같이 참여해보고자 하는 분들도 계시고. 그런 자리인거 같아요, 띵동은. 뭔가 이렇게 지나와 보면 ‘어 맞아 나 그 때, 야 정말, 누군가 한 사람만 있었어도 괜찮았을 텐데’ 하는 그 시점을 생각하게 하고 그래서 내가 뭐라도 기여할 수 있게끔 어떤 지점이 있을까 그런 거를 고민하게 하는?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상훈 : 목회 활동 하시면서 청소년 성소수자 분들도 만나실 거 같아요. 관련해서 생각나는 일이 있나요?
임보라 : 뭐 예를 들어 지금 뭐 이십대지만 십대부터, 중3. 이럴 때부터 안 분들도 있고요. (웃음)와 진짜 그 성장기(웃음). ‘정말로 사람 됐다’ 막 이러면서(웃음). 서로. 그 때는, 예로 표현하자면 굉장히 불안한 거죠. 자기 존재에 대한 불안감, 이렇게 확신이 덜 들고 여러 가지 불안하고 집, 학교 상황이… 한 친구는 만나면서부터 불안한 기운이 막~ 이렇게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그런 친구들이 시간, 시간 지나면서 자기에 대한 긍정성을 갖고, 또 자기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나아가려고 애쓰는 것, 이런 부분들도 있고.
뭐 제일 사실은, 띵동하고 연결 지어서 생각하면은 이제 그 키디다(Kidida)라는 그 친구가 아무래도 더 깊이 남아 있고요. 키디다도 우리가 띵동 일종의 개소식하면서 키디다의 기일에 맞춰서 첫 개소 날을 했단 말이죠, 그래서 제가 인사말하고 나서 또 엄청 울었는데(웃음). 그 키디다도 고등하교 한 이학년 때? 저한테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거든요, 학교에서도 충분히 해소되지 않고 이야기할 사람 없고, 교회도 물론이고, 그런 친구들.
임보라 : 키디다는 먼저 갔지만 기억나는 친구 중의 하나이고. 지금도 보면 고1, 중2 뭐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 계셔요. 물론 뭐, 띵동에도 갈 수 있고 그렇긴 하지만 예를 들면 교회에서만 자란 친구들도 있잖아요. 그리고 교회, 학교 외의 세계에 대해서 아직은 문 열고 나가지 못한 그런 친구들 같은 경우에는 아무래도 목사니까 이렇게 먼저 말 걸기를 하고 탐색을 하는 그런 분들도 많거든요(웃음). 아직 자신에 대한 거를 아직 탐색하고 있는. 그러나 그런 이야기 과정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받고 싶고, 지지 받고 싶어 하는 그런 분들 여전히 계시죠. 어떤 경우는 집에서 탈가정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친구는 오히려 신학을 전공해서, 그런 목회자가 되고 싶어 하는 친구들도 있고. 다양한 청소년들을 만나게 되는 거 같아요.
국방부 앞에서 A대위 석방 집회에서 발언중인 임보라목사님
상훈 : 그렇게 함께 성장해 가시는 거잖아요, 그럴 때 청소년 분들이 성장해가는 모습을 봤을 땐 어떤 거 같아요?
임보라 : 그러니깐요, 사실 뿌듯하죠.(웃음) 마찬가지로 지금도 여전히 이렇게, 일종의 교류하는 분들도 있고 또 중간에 교류가 끊긴 분도 있고 뭐 여러 분들이 있지만, 그리고 오랜 만에 어느 집회 같은 데 보면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경우는(웃음) 어느 학교에 강의를 갔더니 거기 있더라고요(웃음). 세상에 세월이 흐른 것도 흐른 거지만…. 그 새벽에 교회에 앉아, 교회에 저 바깥에, 주일날 아침에 제가 여덟시에서 여덟시 반 되어야 문을 여니까, 클럽 같은 데서 놀다가(웃음) 거기 와가지고는 이렇게 막 쭈구리고 앉아 있다가 문 열면 들어와 가지고 “그러면 일단 좀 주무세요” 이러면은 좀 자고. 그랬던 분이 세상에, 나는 학교 진학을 더 안할 줄 알았더니, 어느 날 가서 앉아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상훈 : 그 때 정말 놀랐겠어요.
임보라 : 그 시기가 정말 그래서 소중한 거 같아요. 비록 학교나 가정에서 충분히 자기 자긍심을 키울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더라도 그러면 다른 누군가라도 제 3의 길이 있어야 되는 거잖아요. 제 3의 길이 있어서 너 참 힘들 거야, 그러나 너는 너대로 괜찮아. 이런 말을 듣는 것과 들을 수 없는 거는 너무 많이 차이가 날 거 같아요. 뭐 사실 그렇게 만났던 십대, 지금 뭐 이십대가 되고 뭐 이렇게 성장한 그 분들이 비단 뭐 저만 만나지는 않았을 거 같아요. 그런 활동가분들도 만나고, 뭐 이런 일종의 롤 모델들? 아 내가 이십대가 되면 저렇겠구나, 삼십대가 되면 저렇겠구나, 사십대가 되면 저렇겠구나, 하는 분들을 어쨌든 이렇게 띵동을 통해서든 연결이 되면 볼 수 있잖아요. 그런 게 되게 중요한 거 같아요.
성찬 예배중에 포도주잔을 들고 있는 임보라목사님
섬돌향린교회에서는 이웃과 나누기 위해 잔과 떡을 두개씩 준비한다고합니다
상훈 : 이 인터뷰를 읽을 수 있는, 일부 성소수자 차별적인 교회 안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수도 있는 청소년성소수자분들에게 어떤 이야기가 해주고 싶으신가요?
임보라 : 일단은 많은 경우 교회에 누가 어떤 이렇게 자기 고민과, 정체성, 인권과 관련되어서 편안하게 이야기를, 가능한지 사실은 알 수가 없잖아요. 교회라는 공간에서. 대부분 설교 같은 걸로 그런 이야기를 시작하면 우리 교회는 그런 곳, 딱 이렇게 생각할 수 있고. 비록 그 교회에서 목사는 목청이 터져라 혐오 설교를 하더라도(웃음), 그 교회 안에는 마찬가지로 성소수자분이 계시기도 하고, 혹은 앨라이로서 “야, 저런 설교를 하냐” 하면서 문제의식을 느끼면서 그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렇게 고민하는 분도 계시고. 그래서 설사 교회, 특히 보수적인 교회를 다니는 청소년 분들은 그래도 혼자가 아닐 것이다, 라고 하는 생각. 당장 이게 금방 눈에 들어오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나와 같은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거라는 게 마음의 의지가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임보라 : 요즘 보면 목사들뿐만 아니라 목사되기 전 단계가 교육을 주로 담당하는 전도사분들이 많이 계신데, 연락이 가끔 와요. 보통은 목회자들도 “우리 교회에는 성소수자가 없어”, “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 이런 분들도 많은데 요즘은 아무리 보수적인 교회라도 예를들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더라도, 교회에서 지내면서 ‘저 사람은 분명히 이렇게 혐오적이지 않은 분일 거다’ 하는 느낌을 갖게 되면 커밍아웃을 한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근래에도 그런 메시지를 받았어요. 본인이 물론 여러 공부 과정에 있고, 아직은 잘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저렇게 반동성애적인 거는 정말 기독교적이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에, 누군가 그렇게 커밍아웃을 해줬는데 너무 깜짝 놀랐다는 거죠.
이렇게 가까이 있다니 생각지도 못하게. 그래서 “그럴 거예요” 몇 천 명 모이는 교회에 설마 한 명만 있겠냐고(웃음). 그런 이야기하고. 이야기 해본 몇몇 분들 “다 그 교회도 다 거쳐 왔던데요?” 이런 이야기도 했는데…. 어쨌든 ‘나만 혼자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 그러니까 ‘누군가 내 곁에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되게 이렇게 좀 덜 외로울 거 같아요. 조금이라도. 그리고 분명히 그렇고. 이게 그냥 허상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 당신 가까이에 누군가 당신을 지지하고 그리고 당신이 뭔가 말을 건넸을 때 충분히, 받아들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얘기. 되게 지금 이야기하니까 되게 교회적인 말 같기는 해요(웃음). 항상, 예수님이 항상 당신, 당신과 함께 계시는, 그 얘기 버전인데?(웃음)
상훈 : 아, 저도 이해가 됐어요(웃음)
임보라 :어떻게 할 수가 없네.(웃음)
상훈 :아시다시피 띵동이 올해가 아름다운재단 인큐베이팅 마지막해인데요. 띵동도 이제 정기 후원이 더욱 절실해지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잖아요? 정기후원을 제안하는 목사님만의 언어가 있나요? 그 사람을 움직일 수 있게 하는?(웃음)
임보라 : 일단은, 사실 청소년 성소수자들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고, 스토리가 있고 그 다음에 통계들도 있잖아요. 그런 걸 이야기했을 때 사람들이 사실 충격을 받지 않는 사람은 없는 거 같아요. 그래서 여러 가지 띵동이 만들어진 이야기들, 그런 것들을 일단은 소개를 하는 거죠. 소개를 하고 그 다음에 재정적인 어떤 정기 후원이 됐던 그게 일시 후원으로 좀 어떤 몫을 하던, 그거에 있어서 제일 좀, 흔히 쓰는 말이긴 하지만은 어쨌든 연대는 후원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이런 말(웃음). 왜냐 하면은 그 후원을 통해서 어떤 일들이 진행되고 있느냐고 했을 때 띵동 만큼 그 다양한 일들을 또 해내는 데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활동들을 그 다음에 소개를 하는 거고.
그리고 어떤 분들은 더 구체적인 일들을 하길 원하기도 하는 거 같아요. 그럴 경우는 제가 아까도 이야기한 것처럼 레인보우키트 이런 거는 정말 교회가 늘 중요시하는 부분이잖아요. 누군가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하는 아주 기본적인. 그래서 좀 레인보우키트 소개를 연말에는 집중해서 해볼까?(웃음) 이런 생각도 한 켠에 하고 있고요.
그리고 이삼십 대 같은 경우는 그런 거 같아요. 직접적으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이런 거. 그러니깐 뭐 자기가 갖고 있는 재능 기부를 할 길이 있을까. 그래서 같이 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신청해놨거든요? 그거 일회성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만나고 접하고 하면서 그분이 어떤 식으로 조금 더 구체적인 기여들을 할 수 있는 그 계기가 될 거 같아요. 그래서 그런 방식으로 소개를 하기도 하고. 그 사람과 관심과 혹은 기여에 대한 방법의 다양성에 맞추어서. 맞춤 광고를.(웃음) 하려고 하지요. 예.
상훈 : 맞춤 광고(웃음). 상대방이 어떤 거를 하고 싶어 하는지 파악해야지 가능한.
임보라 : 저는 그게 연속성이 있을 거 같아요. 그러니까 지속적으로 오래. 또 그런 것도 있잖아요, 자기가 딱 필(feel) 받을 때가 있잖아요.
상훈 :맞아요.(웃음)
임보라 : 그럴 때도 놓치지 않고. 띵동 들어보셨어요? 그런 거 이야기하다보면 마음이 고조되다 보면 그런 경우도 있고. 그래서 그게 뭐 꼭 어떤, 자신이 성소수자인 분들이라고 하는 분들뿐만 아니라, 아까도 이야기했지만은 저 같은 경우에 아무래도 많은 기독교인들을 만나니까, 기독교인으로서 오늘날 내가 뭘 조금이라도 더 기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래도 가장, 절실하게? 좀 필요한 부분을 할 수 있도록 연결을 하는 거죠.
상훈 : 이제 인터뷰가 끝나가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 있으신가요?(웃음)
임보라 : 저는 처음에 띵동 활동가분들, 확실히 초창기의 멤버들이 일부 바뀌기도 하고 더 계속 추가가 되잖아요. 제가 아침에 1층에 입구로 들어오면 엘리베이터 타고 3층으로 오는데. 이번 달은 특히 ‘인권재단사람’에서도 그렇고 집중 캠페인 하는 것 중 하나가 인권활동가들의 상황. 뭐 이런 것들 이야기하면서 인권활동가들인데(웃음) 노동 조건 빵(0) 뭐 이런 거 있잖아요. 거기에 집중이고 거기에 뭐 한 줄씩 써있는거 거의 매일 보죠, 올 때마다.
그래서 어쨌든 띵동도 지속 가능하게끔 운영하는 게 중요하고 그러려면 활동가들, 그리고 사실 더 필요할 텐데. 사실 분야, 분야별로 조금 더 하려면 더 필요할 텐데. 지금 그 몫들을 그 소수가 쪼개서 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그럴 때 한 켠에 사실 마음이 무겁죠. 그래서 일단은 뭐 청소년 성소수자들도 청소년 성소수자들이지만 활동가분들이 너무 고생을 많이 하신다. 그리고 사실은 교회 용어지만 보통 헌신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헌신은, 저는 정말 중요하지만 또 헌신만 얘기되는 건(웃음) 참 안 좋은 거라고 생각하긴 해요. 그럼에도. 갈아 넣으라는 얘기는 아니고 그 여건들은 운영위원을 비롯해서 사실 만들어 가야하는 거고.
다만 그 동안 뭐 연수가 얼마나 됐건 상관없이, 그렇게 헌신해온 그 애씀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어서 되게 미안한 마음, 고마운 마음, 자랑스러운 마음 이런 게 공존하고 있죠. 진짜 열심히 하시는 거 같아요. 우리 기독교 운동 쪽도 어쨌든 활동가들이 있는데, 다들 물론 열심히 하시지만 때론 제 마음에 안 들 때 그런 얘기 제가 하거든요. “성소수자 커뮤니티 활동가들은 정~말 열심히 하는데! 그거는 마음이 절실하지 않아서 그래”(웃음) 그런 꼰대 짓을 할 때도 있죠.
상훈 : (웃음)
기도구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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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가 끝나고 임보라 목사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가 어렸을 때 교회를 다녔던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위 사진에 보이는 기도구슬을 선물로 주셨어요 기도 방법도 알려주셔서 생각날 때 마다 한번씩 꺼내본답니다 :) 청소년 성소수자 이슈에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계시는 임보라목사님을 만나뵙고 겪으셨던 이야기를 들으니 앞으로의 활동이 더욱 기대되는 기분이었어요. 띵동도 앞으로 더 많은 청소년 성소수자들과 함께 성장해 나가도록 할게요~ 다음 인터뷰 때 또 만나요!
[사진제공 : 박김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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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테드 제닝스 : 시카고 신학대학교 교수, 저서 「예수를 사랑한 남자」
예배를 드리는 임보라목사님
스톨(Stole, '영대'라고도 불림)이 둘러진 십자가
멍에를 맨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상훈 :띵동이 처음 시작할 때 ‘레인보우 세이프 스페이스’로 시작했잖아요.2016년 퀴어문화축제에서 성찬식을 드리는 임보라목사님
상훈 : 띵동 시작하기 이전에도 성소수자들과 관련된 활동들을 하셨잖아요, 성소수자 인권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섬돌향린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임보라목사님
띵동에 놓여있는 키디다(Kidida)의 사진
국방부 앞에서 A대위 석방 집회에서 발언중인 임보라목사님
성찬 예배중에 포도주잔을 들고 있는 임보라목사님
섬돌향린교회에서는 이웃과 나누기 위해 잔과 떡을 두개씩 준비한다고합니다
섬동향린교회에 준비된 성찬상
성찬예배 중 떡을 나누는 모습
섬동향린교회 교인들
기도구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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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가 끝나고 임보라 목사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가 어렸을 때 교회를 다녔던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위 사진에 보이는 기도구슬을 선물로 주셨어요 기도 방법도 알려주셔서 생각날 때 마다 한번씩 꺼내본답니다 :) 청소년 성소수자 이슈에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계시는 임보라목사님을 만나뵙고 겪으셨던 이야기를 들으니 앞으로의 활동이 더욱 기대되는 기분이었어요. 띵동도 앞으로 더 많은 청소년 성소수자들과 함께 성장해 나가도록 할게요~ 다음 인터뷰 때 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