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무지개백일장 수상작

띵동상개복치는 장수거북(트랜스메디컬리즘, 자기혐오, 생물학적 본질주의의 모순) / 큅, 2008년생

  개복치,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물고기.


  한동안 이 기괴한 동물에 대해 유행한 인터넷 짤만 모아봐도 내 컴퓨터 한 개는 거뜬하게 터트려질 것이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툭! 죽어버리는 습성 때문에(물론, 사실이 아니다.) 흥행한 웹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에서 주인공이 욕으로도 쓰고, 수달에 의해 물고기 원반이 되기도 하고, 언제나 기생충을 달고 다니며, 흐리멍덩한 표정에, 다른 물고기의 이빨꽂이가 되기까지 하는 처참한 모습을 보고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트랜스젠더. (이야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겠지?)


  자기여성애에 찌든 불쌍한 성전환자들. 이상 성욕을 해결하려고 여성 공간을 공략하려 드는 성범죄자. 어린 여자애들의 자궁과 가슴을 수술로 절단하는 극단적인 사상을 퍼트리는 자들. 모든 사회적 구조를 무너뜨리고 정상적인 사람들을 타락시키고 여성의 공간, 스포츠, 안전 등을 전부 뺏으려는 자들.


  염색체에 새겨져 있는 본질조차 무로 돌리려는 위험한 자들.


  물론, 그렇지 않다. 굳이 정의하자면 우리는 태어난 성별과 자신의 성별을 다르다고 느끼는 사람들. 논바이너리, 트랜스 여성, 트랜스 남성 등 여러 정체성을 포괄적으로 묶는 정의. 그리고 그런 우리의 인권과 안전이 전 세계적으로 무너지고 있다.


  트랜스젠더면 ‘일반’ 사람들과 다르듯 개복치는 위로 봐도 옆으로 봐도 밑에서 봐도 정상적인 물고기와 거리가 참 멀다. 세로로 납작하게 옆으로 세운 우주선이랑도 비슷해 보인다. 닫을 수 없는 입은 흐리멍덩하게 생겼고 외계 생명체라고 해도 믿겠다.


  개복치는 부레도 없다. 대신, 두꺼운 젤라틴이 가득 찬 두꺼운 피부, 연골로 되어 있는 뼈대 등으로 주변의 물과 동일한 부력을 만든다. 부레가 터질 위험이 없기에 햇빛이 가득한 해수면과 심해를 마음껏 오간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등지느러미랑 꼬리지느러미를 파닥여 움직이는 물고기. 꼬리지느러미는 퇴화해 방향잡이 정도로 작동하고, 세로로 세운 우주선같이 수영한다. 사람들이 느리고 이상하다고 주장한 이 무식하게 효율적인 헤엄으로 하루에 몇십 번씩 심해와 수면을 오간다.


  사람들은 동물에게 사람의 기준 갖다 붙이는 것을 참 좋아한다. 나무늘보에게 원죄인 ‘sloth’라는 이름을 붙이고, 연구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채 개복치를 쓸모없다고 하기 좋아한다. 동물은 그것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불공평한 정의나 폭력에 저항할 힘이 참으로 부족하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도 자신의 편견을 덮어씌울 거만을 얻는 것 말이다.


  나는 수많은 트랜스 혐오 속, 가장 슬프고 모순적인 트랜스메디컬리즘을 증오한다. 즉, 생물학적 본질주의를 말이다. 래디컬하지도, 페미니스트적이지도 않은 자칭 ‘래디컬 페미니스트’, 그러니까 ‘터프’가 뱉어대는 혐오와 같은 것. 더 나아가서 여성 억압과 가부장제를 두둔하던, 우생학으로 학살을 이어 나가던 생물학적 본질주의.


  트랜스메디컬리즘이란, 젠더란 존재하지 않고 생물학적 성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이다. ‘트랜스섹슈얼(transsexual)’이라는 단어를 쓰며 트랜스젠더의 정체성이란 의료적 트랜지션에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호르몬이나 수술로 인해 변화를 준 몸일 뿐이지, 남성인 ‘척’하는 여성, 여성인 ‘척’하는 남성이라고 자신들을 부른다.


  이 추태 속에 얼마나 깊은 자기혐오와 치욕이 숨어 있을까.


  터프나 다른 시스젠더가 그러면 그런가 보다 싶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자신과 남이 폭력적인 같음 속으로 동화되길 바라는 사람들도 있다. 존재만으로 이 사회의 뼈대 속에 박혀 있는 성별 규범을 박살 내는 사람이 무서울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이 하는 혐오에 속아 믿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만 트랜스젠더 본인은 다르다.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지 않는가. 한 사람이, 특히나 자기 자신이, 그런 식으로 부정당하면 안 된다는 것을. 트랜스메디컬리스트는 한 사람이 만들어 내는 무수한 우주를 깎아내려 육체에 손을 댄 흔적만으로 정체성을 주장한다. 수많은 트랜스젠더 정체성들을 부정하고 오직 자신만이, 몸에 돈을 억수로 쏟아부으면서 칼을 댄 사람만이 트랜스‘섹슈얼’일 수 있다고 말한다. 트랜스젠더라는 아름답고 복잡한 정체성이 수술과 호르몬 정도인 것뿐으로 납작해지는 것이다.


  자, 이 혼란은 개복치를 처음 본 사람이 느꼈을 만하다. 사람들은 수년 동안 개복치가 뭘 하는 물고긴지 몰랐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바로 장수거북이다. 그렇다. 개복치는 장수거북이다. 바다에서 어찌나 인기가 없는 ‘니치’(biological niche, 생태적 지위)를 차지하는지, 장수거북이랑밖에 겹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슨 뜻이냐면, 이 두 생물의 생태학적 역할이 같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다에 해파리가 무지막지하게 많기 때문이다. 몸의 대부분이 물이고, 영양가가 없다고 하며 심지어 쏘는 촉수까지 있는 해파리. 그러니 해파리를 먹는 생물은 거의 없다. 아, 개복치와 장수거북만 빼고. 칼로리가 거의 0이어도 완전히 0이 아닌 이상 무식하게 많이 먹으면 되는 것이다. 추운 심해를 견디고 에너지를 많이 저장하기 위해 몸집을 키우고 말이다. 개복치와 장수거북은 느리지만 에너지가 거의 들어가지 않는 효율적인 헤엄 방식까지 비슷하다. 장수거북이 수영하는 모습을 90도 돌리면 짜잔! 개복치가 수영하는 방식이랑 거의 동일하다!


  하나는 물고기, 하나는 파충류지만 거의 동일한 생명체가 탄생한 것이다(이걸 ‘수렴 진화’라고 한다). 개복치의 개체수를 봤을 때 참으로 성공적인 생존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가장 쓸모없는 물고기라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가장 쓸모 있는 물고기 중 하나라고 밝혀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나 또한, 수많은 트랜스 혐오 속 가장 슬프고 모순적인 트랜스메디컬리즘을 벗어나려 한다.


  나는 여성이 아니다. 그것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내 주민등록등본, 장기, 2차 성장, 호르몬 등 많은 생물학적 요소는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느꼈던 불일치감.


  흔히 말하는 디스포리아. 한국어로 굳이 표현하자면 성별 불쾌감. 사전적 의미를 읽어준다고 해도 내가 느끼는 바를 정확히 전달할 수 없을 것이다. 거울을 보았을 때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틀림’. 온 실루엣을 망치는 쓸데없는 지방 두 덩이. 끝끝내 오지 않은 2차 성장. 이것을 어떻게 간단하게 정리하냐고.


  불쾌감이 맞긴 하구나. 생각만 해도 내 갈비뼈 저 밑에서부터 들끓는. 옳은 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봤을 때, 특히 나와 같지만 트랜지션에 앞서 있는 사람들을 봤을 때 느껴지는, 장기를 후벼파고 쥐어뜯는 질투 또는 불쾌감. (젠장할, 어렸을 때 거울을 피한 이유가 있었어.)


  그렇다고 해서 난 자신 있게 나 자신이 남성이라고 선언할 용기가 없다.


  여자 화장실에서 쫓겨날 때마다 배시시 웃으면서도 인정을 못 했던 나 자신이다. 언젠가부터 머리는 짧아졌으며, 치마나 여성적인 옷은 옷장에서 소멸했고 “너 여자였어?”(네가 남자인 줄 알았는데)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이 번짐에도, 아직도 제대로 된 커밍아웃을 해보지 못했다.


  얼마나 인정하기 싫었냐면, 내가 여성이 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았다. 난 자기주장이 강하므로 사회가 정한 여성성으로 들어가는 대신, 여성성을 늘려 날 포함하게 만들었다. 뛰어놀기 좋아하고, 강인한 성격과 큰 목소리 등. 전부 여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이고, 여자이기 때문에 포기를 강요받을 것들은 아니다. 내 몸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체형과 무게 때문이라고 정당화하고 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언젠가부터 통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여성’처럼 느껴지는 것을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된 것이다. 머리를 처음 자르고 나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었을 때의 해방감에는 지금도 취할 수 있다.


  그래도 아니겠지. 여성이라는 것에 자긍심을 가지기 위해 여성의 서사를 뒤졌다. 페미니스트 서적, 특히나 트랜스 여성 페미니스트 서적을 죽어라 읽었다. 여성이기 위해, 자신이 여성임을 증명하기 위해 수없이 싸워온 사람이라면 여성이란 무엇인지 알지 않을까 싶었다. 결과적으로,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나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느꼈다.


  몇 년간 고뇌하다 ‘트랜스 매스큘린’이라는 라벨을 겨우 달고 띵동 식당에 처음 갔을 때, 나와 같은 어른들이랑 친구를 만났을 때, 그제야 알았다. 트랜스 남성이라는 정체성이 나에게 편하구나.


  하지만 어려운 걸 어찌하나. 태어난 성은 언제까지나 나를 따라다닐 것이다. ‘진짜’ 남성과는 좁힐 수 없는 간극이 느껴지도록.


  트랜스젠더란, 형용사가 되어야 한다. 트랜스 남성은 남성이다. 시끄러운 남성, 아시안 남성, 초록 셔츠를 입고 있는 남성처럼 말이다. 트랜스젠더라는 말은 그 사람을 설명하는 것이다. (다르다고)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트랜스 남성이라는 것까지는 어렵지 않게 인정할 수 있다. 그 외에 무엇이 될 수 있는가. (논바이너리인가도 생각해 보았지만 트랜스 남성이라는 정체성이 나랑 더 잘 맞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진짜 남자라는 것은 훨씬 더 어렵게 생각된다. 동성과 이성을 생각하는 것도 어렵다. 그러므로 나는 나 자신을 트랜스 남성, 즉 형용사가 붙은 명사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저 여성으로 태어났기 때문. 결국 내 깊은 내면에는 생물학적 본질주의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나는 커서 트랜지션을 하면 그것을 방패 삼아 내 정체성을 지킬 것이다. 내 내면과 내가 느끼는 바가 덜 중요하다는 듯이.


  차라리 트랜스메디컬리스트였으면 편했을지 모르겠다. 모두를 똑같이 그렇게 바라봤을 테니. 하지만 어쩐 이유에선지 다른 트랜스젠더 사람들을 만나면 트랜지션과 상관없이, 생물학적 성과 상관없이 그것이 그들의 진짜 성으로 느껴진다.


  결국 깊은 자기혐오에서 오는 것이겠지. 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런 자신이 치욕스러운 것이겠지.


  하지만 알아야 한다. 나 자신도 존엄을 받아야 하는 한 명의 사람이고, 나 자신에게 존엄을 주는 것을 포기하는 순간, 다른 사람도 똑같은 위치로 떨어뜨릴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그러니 이성적인 생각으로 되새겨야 하는 것이다. 감정과 달리 그것은 내가 주체성을 가지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니.


  생물학처럼 신기하고 복잡하고 다양한 학문으로 본질주의를 외치는 인간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알까.


  개복치는 장수거북이다. 고래는 물고기며, 공룡은 살아 있다. 이러한 학문으로 무슨 본질주의를 주장하는가. 무엇의 본질을 찾았다 하면 또 다른 생명체가 등장해 우리가 알고 있던 모든 것을 주기적으로 뒤엎는다.


  학계 또한 얼마나 우스운지 모른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속으로 부친을 욕망한다는 이야기도, 여성의 자궁이 온몸을 돌아다니며 병을 키운다는 이야기도, 하이에나가 개 과라는 이야기도 한때 진실로 여겨졌다. 꽉 막혀 있고, 고집이랑 편견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앞서 나가는 것이 학문이다. 결함으로 가득 찬 인간들이 결함으로 가득 찬 데이터를 해석해 세상에 대한 결함 가득한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우리는 심지어 자궁내막증이 탈모보다 연구가 덜 된 세상에 산다.


  이렇게 복잡한 것을 어린이들에게 가르치려고 쉽게 만들어놓은 정보로 생물학적 본질주의를 말하는 것도 신기하다. XX 염색체는 여자, XY는 남자라는 것 말이다.


  성이라는 복잡한 생물학적 요소는 알 수 없는 수많은 요소에 의해 다양한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같은 성 속에서도 다양한 표현형이 있으며 간성의 존재까지 불러오면 무수한 다양성을 맛볼 수 있다. 유전자도 한몫하겠지. 태아의 환경, 호르몬 분비, 자라온 환경. 인간의 몸이 어디나 그렇듯, 정말 복잡하다.


  특정한 설치류는 Y 염색체가 없다. 인간에게 있는 Sry 유전자가 아예 없는 것이다. 인간의 경우 여성화가 ‘디폴트’라면 남성화는 Sry 유전자의 트리거가 당겨져야 시작한다. 즉 트리거가 당겨지지 않는다면 몸은 여성화를 진행하고, Y 염색체에는 바로 그 트리거가 있는 것이다. 그 후의 남성화는 수많은 염색체에 있는 유전자가 발현되고 억압되는 복잡한 과정에 의해 진행된다. 그런데 이 Sry라는 트리거, Y 염색체가 없이도 남성화를 진행시키는 생물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XXXXXYYYYY 염색체를 가지고 있다는 오리너구리 수컷에게는 그럼 Sry 유전자가 많나? 아니다! 그 많은 Y 염색체 중 단 한 개에도 없다. 완전히 다른 트리거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Y 염색체 유전자가 백만 년에 다섯 개꼴로 줄고 있으니, 다 없어졌을 때쯤 자연이 인간의 남성화를 진행시킬 다른 생소한 방법도 만들어 내겠지.


  자, 보아라. 생물학적 본질주의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지. 우리의 피가 파랗게 흐른다는 것과도 같은 주장이다.


  그러므로 난 너에게 개복치라는 단어를 선물하고 싶어. 개복치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다면. 존재하는 것을 넘어서 번창한다면(thrive), 그 무엇도 멀쩡한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이잖아. 아무리 덜떨어지고 이상해 보여도 말이야.


  그러니 네게 너의 존재를 증명할 거야. 계속해서, 끊임없이. 까먹을 때쯤 되었을 때 또. 아직 모르잖아. 네가 ‘진짜’ 트랜스젠더가 맞는지. 네가 느끼는 것은 진짜 디스포리아인지. 감히, 의료적 트랜지션을 네 성별을 증명하는 방패로 쓰지 않을 수 있는지도.


  그러니까 이것은 내가 너에게 하는 약속. 미래에 내가 되어갈 사람. 어릴 적, 위로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고 내 머릿속 뒤편에서 조용히 썩어나가던 사람. 절대로 그렇게 추해지지 말자. 생물학적 본질주의를 주장하며 남들을 처참하게 짓밟지 말자. 자긍심을 갖자.


  너 자신에 대한 자긍심. 나 자신에 대한 자긍심. 나는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기에. 세상 사람들 한 명 한 명 모두 그럴 가치가 있기에. 나 자신이 어찌 유일한 예외가 될 수 있을까.


  개복치는 이상하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이상하지 않다. 

  그러므로 너는 이상하지 않다.


  개복치는 틀리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틀리지 않다. 

  그러므로 너는 틀리지 않다.


  개복치는 존재할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할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너는 존재할 가치가 있다.


  내가 존재할 권리는 남에게 없다. 난 존재하기 때문이고, 그것만으로 증명은 충분해. 그러므로 너는 존재해.



  + 마지막으로, 김보영 작가의 『사바삼사라』를 꼭 읽어보았으면 한다. 내가 본 작품 중 가장 멋진 작품 중 하나였고, 트랜스젠더인 사람을 직접적으로 다루진 않지만 장애, 사회적 약자성, 가정폭력, 치욕이랑 자긍심 등을 정말 잘 다룬 책이었다. 판타지여서 재밌기도 하고.



[심사위원 작품평] 


<개복치는 장수거북>은 흔히 연약함과 나약함의 대명사로 소비되는 ‘개복치’를 소재로 삼아, 인간의 자의적인 기준에 의해 재단당하는 생물과 트랜스젠더의 삶을 겹쳐내는 시선이 무척 예리한 글입니다. 사뭇 전문적이고 상세한 생물학적 지식들은 글의 신뢰도를 견인하며, 세상의 편견에 반박하기 위해 글쓴이가 홀로 얼마나 치열하게 사유해 왔을지 짐작하게 합니다. “개복치는 이상하지 않다”라는 전제로부터 자신의 존재 가치를 논리적으로 증명해 낸 단단한 선언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습니다. 이 치열한 사유와 글쓰기가 큅 님이 나아갈 앞으로의 시간들을 든든하게 지탱하는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누구의 승인도 필요 없는 큅 님만의 궤적을 묵묵히 그려나가며, 거센 파도에도 흔들림 없이 유영해 나갈 앞날을 진심을 다해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심사위원  수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