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시나브로’라고 하는 단어를 참 좋아합니다. 어감이 귀엽다고 느껴져서일까요. 뜻이 마음에 들어서일까요. 처음 ‘시나브로’라는 단어의 뜻을 알게 된 이후로 이 단어를 보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편해지기도 합니다. ‘시나브로’는 순우리말로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요, 오늘은 이와 관련된 제가 살아온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제가 저를 ‘게이’라고 인정하게 된 것은 사실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남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많이 했지만, 저 역시 정상성을 요구하는 사회 속에서 이성애 중심적인 것들을 주로 보면서 자라다 보니 지향성에 대해 깊이 생각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중학교 2학년이 되고, 처음으로 BL이라고 하는 장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호기심으로 보기 시작한 ‘시맨틱 에러’라는 작품이었는데, 이 작품 덕분에 저는 처음으로 “어쩌면 나는 남자에게 끌리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본격적인 지향성에 관한 고민이 시작된 것이죠. 사실 BL이라고 하는 장르가 현실과 동떨어진 부분이 많고, 판타지적인 요소가 많이 가미된 장르이기에, 현실 속 퀴어의 삶을 대변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많다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에게 있어 ‘시맨틱 에러’라는 작품은 제가 조금 더 저다운 삶을 살게 해 준 기폭제 역할을 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뒤로 바로 저를 ‘게이’로 정체화한 건 아닙니다. 처음에 저는 제 지향성이 ‘바이’이리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연애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의 관계였지만, 초등학생 시절 몇 번 연애를 해본 경험이 있었기에 저는 남자에게도 끌리는 줄 알았습니다. 그 이후로도 고민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자연스럽게 ‘호모플렉시블’이라고 하는 지향성도 알게 되었습니다. 단어를 알게 된 당시에는 어쩌면 ‘호모플렉시블’이 나를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에게 “내가 정말 이성에게 끌린 적이 있었나?”라는 질문을 여러 번 해보았을 때, 그에 대한 저의 대답은 “아니”였습니다. 물론 성적 지향 또한 스펙트럼이기 때문에 한 가지로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지금은 저 자신을 게이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고, 끊임없는 고민이 이어졌던 과거보다 훨씬 편안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의 욕망을 인정하는 것이 이토록 어려웠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쉽사리 인정하지 못했던 것은 제 지향성을 부정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직 한국 사회가 성소수자에게 포용적이지 못하다는 사실 역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제가 함께할 파트너를 만나 안정적인 노년을 보내는 미래를 뚜렷하게 상상하기는 어려우니까요. 어쩌면 과거의 나는 나를 ‘게이’라고 규정하고 살았을 때 겪게 될 여러 사회적 풍파를 이겨낼 용기가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용기를 낼 터이니 앞으로 더 많은 나이 든 퀴어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2024년, 계엄이 터지면서는 시국 집회에 자주 나갔습니다. 시국 집회를 나갈 때마다 했던 저만의 루틴이 있었는데요. 바로 무지개 깃발을 찾아서 사진을 찍는 것이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서슴지 않고 혐오 발언을 하는 친구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던 것에 비해 평등 수칙이 제정된 광장에서는 혐오 발언을 찾아보기가 어려웠거니와 설령 혐오 발언을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곧바로 제지하고, 잘못된 표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기에 광장에 있는 동안은 저 자신이 온전하게 받아들여지고, 보호받는다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곳곳에 있었던 무지개 깃발을 보면서도 “이 공간 속에 퀴어는 나 혼자가 아니구나”, “적어도 저 사람들은 나를 배척하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안심하고 시국 집회에 참가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글을 빌려 항상 광장에 나와주셨던 무지개 깃발 기수분들께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이에 용기를 얻어 2025년에는 대구 퀴어 퍼레이드에 참석했습니다. 사실 지역 특성상 아는 사람을 마주칠까 조금은 두렵기도 했지만, 트위터(현 X)상에서만 접했던 사람들을 실제로 마주하면서 새삼 “내가 자각하지 못했더라도 우리의 삶 속에는 정말 많은 퀴어와 앨라이가 있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내심 기뻤습니다. 사실 2024년에도 근처에 볼일이 있어 잠시 참석했었지만, 행진까지 참여할 용기는 없어 금방 집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에서야 돌아보면 당시의 저는 인터넷으로만 마주했던 혐오 세력을 실제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다시 참여한 2025년 대구 퀴어 퍼레이드에서는 행진까지 잘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힘들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저는 행복했던 그날의 기억을 마음속에 품고 또다시 1년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듬해인 2026년 서울 퀴어 퍼레이드에도 참석했는데요. 아무래도 대구 퀴어 퍼레이드보다 큰 규모로 개최되다 보니 전보다 훨씬 많은 혐오 세력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행사장에서 조금 떨어진 지하철 출구로 나오며 혐오 세력을 마주했을 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그들 앞에 섰을 때 느끼는 위축감과 한없이 작아지는 듯한 감각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제는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자긍심을 느끼며, 혐오를 외치는 그들 앞에서 당당히 사랑을 외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올해 서울 퀴어 퍼레이드도 부모님께 당당히 말씀드리지는 못한 채로 참여했습니다. 그저 서울 여행이라고만 말씀드리고 현관을 나섰죠. 언젠가는 저에게도 부모님과 함께 성소수자 부모 모임에 참석할 수 있는 미래를 꿈꿔봅니다.
저도 처음부터 이렇게 벽장 밖으로 나와 활동할 생각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처음 커밍아웃했던 가장 친한 친구들 이외에는 제가 게이임을 밝히지 못할 줄 알았고, 부끄럽게도 게이, 바이, 레즈비언 이외의 다른 정체성과 지향성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 자신과 이 글을 읽을 여러분께 ‘시나브로’라는 단어를 선물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일상에서도 시나브로 용기를 내고 그에 따른 행동을 이어가며, 제가 느꼈던 감정을 여러분도 느끼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제가 해냈듯이, 여러분도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고, 더 많은 사람과 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창한 행동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그것이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이어도 좋고,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어도 좋습니다. ‘시나브로’의 뜻처럼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여러분이 스스로를 더 자세히 알아갔으면 좋겠고, 그 과정을 통해 여러분이 더욱 행복한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언젠가 부모님께 당당하게 제 이야기를 해낼 날을 위해서 용기를 시나브로 모으고 있겠습니다. 모두가 시나브로 나아간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가 되리라 믿습니다.
[심사위원 작품평]
심사위원들은 루크 님이 자신에게 가닿는 과정을 ‘시나브로’라는 순우리말 하나에 포개어 낸 시선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자신을 알아가는 걸음을 담담하게 풀어낸 장면들이 인상적입니다. 광장의 무지개 깃발 앞에서 혼자가 아님을 확인하던 안도감과, 부모님께는 서울 여행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망설임이 나란히 놓인 지점에서, 용기는 그렇게 조금씩 걸음으로 쌓입니다. 그리고 그 걸음은 이미 루크 님의 보폭과 속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심사위원 다랴 |
저는 ‘시나브로’라고 하는 단어를 참 좋아합니다. 어감이 귀엽다고 느껴져서일까요. 뜻이 마음에 들어서일까요. 처음 ‘시나브로’라는 단어의 뜻을 알게 된 이후로 이 단어를 보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편해지기도 합니다. ‘시나브로’는 순우리말로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요, 오늘은 이와 관련된 제가 살아온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제가 저를 ‘게이’라고 인정하게 된 것은 사실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남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많이 했지만, 저 역시 정상성을 요구하는 사회 속에서 이성애 중심적인 것들을 주로 보면서 자라다 보니 지향성에 대해 깊이 생각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중학교 2학년이 되고, 처음으로 BL이라고 하는 장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호기심으로 보기 시작한 ‘시맨틱 에러’라는 작품이었는데, 이 작품 덕분에 저는 처음으로 “어쩌면 나는 남자에게 끌리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본격적인 지향성에 관한 고민이 시작된 것이죠. 사실 BL이라고 하는 장르가 현실과 동떨어진 부분이 많고, 판타지적인 요소가 많이 가미된 장르이기에, 현실 속 퀴어의 삶을 대변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많다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에게 있어 ‘시맨틱 에러’라는 작품은 제가 조금 더 저다운 삶을 살게 해 준 기폭제 역할을 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뒤로 바로 저를 ‘게이’로 정체화한 건 아닙니다. 처음에 저는 제 지향성이 ‘바이’이리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연애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의 관계였지만, 초등학생 시절 몇 번 연애를 해본 경험이 있었기에 저는 남자에게도 끌리는 줄 알았습니다. 그 이후로도 고민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자연스럽게 ‘호모플렉시블’이라고 하는 지향성도 알게 되었습니다. 단어를 알게 된 당시에는 어쩌면 ‘호모플렉시블’이 나를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에게 “내가 정말 이성에게 끌린 적이 있었나?”라는 질문을 여러 번 해보았을 때, 그에 대한 저의 대답은 “아니”였습니다. 물론 성적 지향 또한 스펙트럼이기 때문에 한 가지로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지금은 저 자신을 게이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고, 끊임없는 고민이 이어졌던 과거보다 훨씬 편안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의 욕망을 인정하는 것이 이토록 어려웠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쉽사리 인정하지 못했던 것은 제 지향성을 부정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직 한국 사회가 성소수자에게 포용적이지 못하다는 사실 역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제가 함께할 파트너를 만나 안정적인 노년을 보내는 미래를 뚜렷하게 상상하기는 어려우니까요. 어쩌면 과거의 나는 나를 ‘게이’라고 규정하고 살았을 때 겪게 될 여러 사회적 풍파를 이겨낼 용기가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용기를 낼 터이니 앞으로 더 많은 나이 든 퀴어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2024년, 계엄이 터지면서는 시국 집회에 자주 나갔습니다. 시국 집회를 나갈 때마다 했던 저만의 루틴이 있었는데요. 바로 무지개 깃발을 찾아서 사진을 찍는 것이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서슴지 않고 혐오 발언을 하는 친구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던 것에 비해 평등 수칙이 제정된 광장에서는 혐오 발언을 찾아보기가 어려웠거니와 설령 혐오 발언을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곧바로 제지하고, 잘못된 표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기에 광장에 있는 동안은 저 자신이 온전하게 받아들여지고, 보호받는다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곳곳에 있었던 무지개 깃발을 보면서도 “이 공간 속에 퀴어는 나 혼자가 아니구나”, “적어도 저 사람들은 나를 배척하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안심하고 시국 집회에 참가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글을 빌려 항상 광장에 나와주셨던 무지개 깃발 기수분들께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이에 용기를 얻어 2025년에는 대구 퀴어 퍼레이드에 참석했습니다. 사실 지역 특성상 아는 사람을 마주칠까 조금은 두렵기도 했지만, 트위터(현 X)상에서만 접했던 사람들을 실제로 마주하면서 새삼 “내가 자각하지 못했더라도 우리의 삶 속에는 정말 많은 퀴어와 앨라이가 있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내심 기뻤습니다. 사실 2024년에도 근처에 볼일이 있어 잠시 참석했었지만, 행진까지 참여할 용기는 없어 금방 집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에서야 돌아보면 당시의 저는 인터넷으로만 마주했던 혐오 세력을 실제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다시 참여한 2025년 대구 퀴어 퍼레이드에서는 행진까지 잘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힘들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저는 행복했던 그날의 기억을 마음속에 품고 또다시 1년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듬해인 2026년 서울 퀴어 퍼레이드에도 참석했는데요. 아무래도 대구 퀴어 퍼레이드보다 큰 규모로 개최되다 보니 전보다 훨씬 많은 혐오 세력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행사장에서 조금 떨어진 지하철 출구로 나오며 혐오 세력을 마주했을 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그들 앞에 섰을 때 느끼는 위축감과 한없이 작아지는 듯한 감각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제는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자긍심을 느끼며, 혐오를 외치는 그들 앞에서 당당히 사랑을 외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올해 서울 퀴어 퍼레이드도 부모님께 당당히 말씀드리지는 못한 채로 참여했습니다. 그저 서울 여행이라고만 말씀드리고 현관을 나섰죠. 언젠가는 저에게도 부모님과 함께 성소수자 부모 모임에 참석할 수 있는 미래를 꿈꿔봅니다.
저도 처음부터 이렇게 벽장 밖으로 나와 활동할 생각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처음 커밍아웃했던 가장 친한 친구들 이외에는 제가 게이임을 밝히지 못할 줄 알았고, 부끄럽게도 게이, 바이, 레즈비언 이외의 다른 정체성과 지향성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 자신과 이 글을 읽을 여러분께 ‘시나브로’라는 단어를 선물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일상에서도 시나브로 용기를 내고 그에 따른 행동을 이어가며, 제가 느꼈던 감정을 여러분도 느끼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제가 해냈듯이, 여러분도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고, 더 많은 사람과 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창한 행동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그것이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이어도 좋고,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어도 좋습니다. ‘시나브로’의 뜻처럼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여러분이 스스로를 더 자세히 알아갔으면 좋겠고, 그 과정을 통해 여러분이 더욱 행복한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언젠가 부모님께 당당하게 제 이야기를 해낼 날을 위해서 용기를 시나브로 모으고 있겠습니다. 모두가 시나브로 나아간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가 되리라 믿습니다.
[심사위원 작품평]
심사위원들은 루크 님이 자신에게 가닿는 과정을 ‘시나브로’라는 순우리말 하나에 포개어 낸 시선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자신을 알아가는 걸음을 담담하게 풀어낸 장면들이 인상적입니다. 광장의 무지개 깃발 앞에서 혼자가 아님을 확인하던 안도감과, 부모님께는 서울 여행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망설임이 나란히 놓인 지점에서, 용기는 그렇게 조금씩 걸음으로 쌓입니다. 그리고 그 걸음은 이미 루크 님의 보폭과 속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심사위원 다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