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서랍 가장 깊은 곳에는 차마 열어보지 못하는 빛바랜 종이가방이 하나 있다. 그 안에는 네가 남기고 간 사소한 흔적들이 잠들어 있다.
아프지 말라는 손글씨 메모지, 내 생일날 함께 갔던 전시회 티켓, 그리고 너의 살결에서 나던 향을 꼭 닮은, 이제는 단종되어 구하기 힘든 은은한 향수병. 너를 내 삶에서 떠나보낸 지 제법 오랜 계절이 흘렀음에도, 내 시간의 태엽은 여전히 그 주위를 맴돌며 서성이고 있었다. 흔적을 버리지 못하는 건 결국 미련이라는 질척한 감정이었고, 종이가방을 열지 못하는 건 두려움이었다.
여자와 여자의 사랑이라서 더 애틋했다거나, 세상의 시선을 피해 우리만의 조그만 섬을 만들어야 해서 더 치열했다고 변명하고 싶지는 않다. 성별을 지우고 보아도 나는 그저 내 삶, 더 나아가 나 자신을 송두리째 흔들 만큼 너를 깊이 사랑했을 뿐이다. 너의 존재가 내 세계의 중심축이었고, 네가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법을 나는 어디에서도 배우지 못했다. 사실 지금도 다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기도 하다.
그랬기에 이별 후 한동안 내 일상은 너를 기억하는 일과 원망하는 일 사이의 위태로운 줄타기였다. 네가 좋아하던 음악이 우연히 흘러나오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걸음을 멈췄고, 너와 비슷한 실루엣이나 헤어스타일만 보아도 숨이 멎는 듯했다. 그것은 지독한 갈증이었고, 과거에 스스로를 가둔 채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않으려는 고집스러운 집착이었다. 너를 잃은 나 자신을 영원히 가여워하며, 나는 매일 밤 과거의 기억을 헤집어 상처를 덧내곤 했다.
오늘 아침, 빗소리에 눈을 떠 창가로 스며드는 서늘한 공기를 맡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생 너라는 페이지에 머물며 다음 장을 넘기지 못하는 건, 우리가 그토록 치열하게 나누었던 찬란한 시절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너라는 존재를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우는 것은 불가능할지라도, 최소한 나를 천천히 갉아먹는 이 아픈 집착의 부피를 조금씩 줄여나갈 수는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나는 오늘, 거창한 결심 대신 아주 작고 사소한 연습을 시작하기로 했다. 단번에 너를 잊겠노라 선언하는 무모함 대신, 매일 아주 조금씩 너를 다정하게 방생하는 연습을. 휴대폰 깊숙이 숨겨두었던 네 사진을 꺼내어 보았다. 단발머리가 참 잘 어울렸던 너, 웃을 때마다 반달 모양이 되던 다정한 네 눈매. 참 예쁜 사람이었구나, 우리는 참 예쁘게도 서로를 안아주었구나. 원망과 아픔이 한풀 꺾인 자리에 비로소 그 시절의 아름다움이 온전한 형태로 보이기 시작했다. 너는 내 삶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흉터를 남긴 사람이 아니라, 내 가장 눈부신 시절을 함께 채워준 고마운 존재였다는 걸 이제야 가만히 인정하게 된다.
자리에서 일어나 오랫동안 먼지가 쌓여 있던 종이가방을 찬찬히 열었다. 조심스럽게 네 흔적들을 손으로 쓸어본다. 나는 아직 나약하기에, 여전히 내 마음 한구석에는 너를 위해 지어둔 방이 남아있을 것이다. 평생 그 방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 방의 문을 걸어 잠근 채 바닥에 주저앉아 울부짖지 않으려 한다. 가끔 바람이 좋은 날, 먼지를 털어내듯 그 방의 창문을 열어 환기하고, 이내 미련 없이 문을 닫고 돌아서는 단단함이 내게도 조금씩 생겨나고 있으니까.
너를 완전히 잊지 못해도 괜찮다. 그저 오늘 연습한 만큼만 마음이 옅어질 수 있다면, 내일은 오늘보다 단 한 걸음이라도 더 가볍게 걸어 나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방을 나서는 길, 작은 연습 끝에 마주한 세상의 풍경이 유난히 다정하게 느껴진다.
[심사위원 작품평]
지나간 사랑의 흔적을 억지로 지우기보다, 찬란했던 시간과 다정하게 화해해가는 과정이 참 따스하고 눈부십니다. '단번에 잊겠다'는 무모함 대신 '조금씩 다정하게 방생하는 연습을 하겠다'는 다짐은 깊은 울림과 위로를 전합니다. 아픔을 회피하지 않고 '눈부신 시절의 선물'로 고쳐 담는 마음의 단단함과 종이가방 속 기억을 마주하는 모습에서 꽃가람 님의 순수한 용기가 느껴집니다. 완벽히 잊지 않아도 괜찮다는 따뜻한 수용이 마음의 창문을 열어 다정한 바람을 들여놓았습니다. 심사위원들은 정갈한 문장 결 덕분에 글을 읽고 마주한 세상도 한층 다정하게 느껴졌습니다. 지나온 모든 계절을 품어낸 꽃가람 님의 작은 연습이 한결 가볍고 빛나기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심사위원 우재 |
내 서랍 가장 깊은 곳에는 차마 열어보지 못하는 빛바랜 종이가방이 하나 있다. 그 안에는 네가 남기고 간 사소한 흔적들이 잠들어 있다.
아프지 말라는 손글씨 메모지, 내 생일날 함께 갔던 전시회 티켓, 그리고 너의 살결에서 나던 향을 꼭 닮은, 이제는 단종되어 구하기 힘든 은은한 향수병. 너를 내 삶에서 떠나보낸 지 제법 오랜 계절이 흘렀음에도, 내 시간의 태엽은 여전히 그 주위를 맴돌며 서성이고 있었다. 흔적을 버리지 못하는 건 결국 미련이라는 질척한 감정이었고, 종이가방을 열지 못하는 건 두려움이었다.
여자와 여자의 사랑이라서 더 애틋했다거나, 세상의 시선을 피해 우리만의 조그만 섬을 만들어야 해서 더 치열했다고 변명하고 싶지는 않다. 성별을 지우고 보아도 나는 그저 내 삶, 더 나아가 나 자신을 송두리째 흔들 만큼 너를 깊이 사랑했을 뿐이다. 너의 존재가 내 세계의 중심축이었고, 네가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법을 나는 어디에서도 배우지 못했다. 사실 지금도 다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기도 하다.
그랬기에 이별 후 한동안 내 일상은 너를 기억하는 일과 원망하는 일 사이의 위태로운 줄타기였다. 네가 좋아하던 음악이 우연히 흘러나오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걸음을 멈췄고, 너와 비슷한 실루엣이나 헤어스타일만 보아도 숨이 멎는 듯했다. 그것은 지독한 갈증이었고, 과거에 스스로를 가둔 채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않으려는 고집스러운 집착이었다. 너를 잃은 나 자신을 영원히 가여워하며, 나는 매일 밤 과거의 기억을 헤집어 상처를 덧내곤 했다.
오늘 아침, 빗소리에 눈을 떠 창가로 스며드는 서늘한 공기를 맡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생 너라는 페이지에 머물며 다음 장을 넘기지 못하는 건, 우리가 그토록 치열하게 나누었던 찬란한 시절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너라는 존재를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우는 것은 불가능할지라도, 최소한 나를 천천히 갉아먹는 이 아픈 집착의 부피를 조금씩 줄여나갈 수는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나는 오늘, 거창한 결심 대신 아주 작고 사소한 연습을 시작하기로 했다. 단번에 너를 잊겠노라 선언하는 무모함 대신, 매일 아주 조금씩 너를 다정하게 방생하는 연습을. 휴대폰 깊숙이 숨겨두었던 네 사진을 꺼내어 보았다. 단발머리가 참 잘 어울렸던 너, 웃을 때마다 반달 모양이 되던 다정한 네 눈매. 참 예쁜 사람이었구나, 우리는 참 예쁘게도 서로를 안아주었구나. 원망과 아픔이 한풀 꺾인 자리에 비로소 그 시절의 아름다움이 온전한 형태로 보이기 시작했다. 너는 내 삶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흉터를 남긴 사람이 아니라, 내 가장 눈부신 시절을 함께 채워준 고마운 존재였다는 걸 이제야 가만히 인정하게 된다.
자리에서 일어나 오랫동안 먼지가 쌓여 있던 종이가방을 찬찬히 열었다. 조심스럽게 네 흔적들을 손으로 쓸어본다. 나는 아직 나약하기에, 여전히 내 마음 한구석에는 너를 위해 지어둔 방이 남아있을 것이다. 평생 그 방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 방의 문을 걸어 잠근 채 바닥에 주저앉아 울부짖지 않으려 한다. 가끔 바람이 좋은 날, 먼지를 털어내듯 그 방의 창문을 열어 환기하고, 이내 미련 없이 문을 닫고 돌아서는 단단함이 내게도 조금씩 생겨나고 있으니까.
너를 완전히 잊지 못해도 괜찮다. 그저 오늘 연습한 만큼만 마음이 옅어질 수 있다면, 내일은 오늘보다 단 한 걸음이라도 더 가볍게 걸어 나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방을 나서는 길, 작은 연습 끝에 마주한 세상의 풍경이 유난히 다정하게 느껴진다.
[심사위원 작품평]
지나간 사랑의 흔적을 억지로 지우기보다, 찬란했던 시간과 다정하게 화해해가는 과정이 참 따스하고 눈부십니다. '단번에 잊겠다'는 무모함 대신 '조금씩 다정하게 방생하는 연습을 하겠다'는 다짐은 깊은 울림과 위로를 전합니다. 아픔을 회피하지 않고 '눈부신 시절의 선물'로 고쳐 담는 마음의 단단함과 종이가방 속 기억을 마주하는 모습에서 꽃가람 님의 순수한 용기가 느껴집니다. 완벽히 잊지 않아도 괜찮다는 따뜻한 수용이 마음의 창문을 열어 다정한 바람을 들여놓았습니다. 심사위원들은 정갈한 문장 결 덕분에 글을 읽고 마주한 세상도 한층 다정하게 느껴졌습니다. 지나온 모든 계절을 품어낸 꽃가람 님의 작은 연습이 한결 가볍고 빛나기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심사위원 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