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를 쓴다고 해서 네가 읽을 거라고 확신하는 건 아니야. 사실, 네가 읽기를 원하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이걸 끝까지 쓸지, 또 이걸 써서 부칠지 말지도 모르겠어. 부칠 수 있기는 할까? 그 아파트 단지를 찾아간다면 너희 집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정확한 주소가 기억나지 않아. 그래, 아마 이 편지를 영원히 부칠 수 없을 거야. 그럼에도 나는 빈 화면을 문장들로 채우고 있어.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편지는 인사와 안부로 시작하지, 아마. 그럼 이렇게 물어볼까. 잘 지내니, 학교생활은 어떠니, 동생이랑 오빠는 어떻게 지내고 교회는 아직도 다니니, 서울 올 일이 생기면 연락하겠다며, 왜 아무 전화가 없어. 또, 너무 어릴 때라서 연락처를 교환하지 못한 게 아쉽네, 나는 그럭저럭 잘 살고 있어, 이런 말도 덧붙이고. 솔직하게 굴고 있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야. 그치만 십 년 만에 너에게 거는 말인데, 우울한 소리만 늘어놓을 수는 없잖아. 그게 예의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아.
십 년 만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네가 알던 나와 지금의 나는 꽤 비슷할 거야. 여전히 키는 평균보다 좀 작은 축이고, 여전히 책 읽는 걸 좋아하고, 여전히 배우가 되고 싶어 해. 더 이상 아홉 살이 아닌 너는 내가 예체능 입시라도 하고 있나 생각하겠지만 그건 아니야. 이상주의자라는 말을 가끔 듣긴 하지만 이제 나는 현실과 타협하는 법을 배웠어. 나는 예쁘지도 않고, 노래를 잘하지도 못하고, 자신감도 없지만 공부는 꽤 해서, 오직 거기에만 매달리는 중이야. 너도 그러고 있으려나, 잘 모르겠다. 아홉 살 때의 너는 어렴풋이 기억하지만, 열아홉 살의 네가 어떤 사람인지, 나는 모르니까. 그리고 그게 나를 무섭게 만들어.
아주 오랫동안, 너는 내가 거리낌 없이 친구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확신을 가지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그리고 그걸 확신하는 순간 기대가 깨져버리는 걸 너무 많이 겪었으니까. 지금 나의 두 친구는 너와 헤어진 그해에 처음 만났는데, 그 애들도 중학생이 될 무렵에야 친구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어. 내가 사람을 너무 못 믿고 매정하다고?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나는 너를 좋아했고, 너도 나를 좋아한다는 확신이 있었다는 거야. 어려서 그랬을까? 잘 모르겠어. 어린이들이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기억이 안 나. 하지만 그때는 내가 지금보다 멍청했다는 걸 알아. 그리고 지금보다 더 착했다는 걸 알아.
내가 무서운 지점은 그거야. 내가 친구라 불렀던 건 과거의 멍청하고 착한 너였고, 네가 친구라고 불렀던 건 과거의 멍청하고 착한 나였는데, 현재의 우리가 서로를 마주한다면 그때는 서로를 더 이상 친구라고 부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야. 단순히 서로를 본 지 너무 오래되어서 그런 게 아니야. 이제는 내가 네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알아서 그래.
아니, 오해는 하지 마. 네가 싫은 것도, 하느님이 싫은 것도 아니야. 나는 하늘에 계신 너와 나의 아버지가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처럼 자애로울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그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항상 그의 말씀을 따르지는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어. 나를 완전히 잘못된 이유로 정신병자라 부르는 사람이 있었어. 물론 그 사람은 내가 옷장 안에 숨겨놓은 무지개 깃발의 존재를 몰랐겠지. 책상 위 펼친 사회문화 수능특강에 나온 젠더라는 단어를 가리키며 거짓말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어. 설명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서 말이야. 그리고 그 사람들은 말했어. 그건 하느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방식이 아니라고. 하지만 나는 분명 여기 있는데. 너와 같은 방식으로 빚어져서 너와 같은 교실을 공유하고, 시험 직전에는 너와 같은 신에게 찍은 문제를 다 맞히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리는데. 내가 아는 신은 너의 이름처럼 은혜로운데.
그래서 네가 지금의 나를 만난다면, 그때와 비슷한 사람인 나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여길까 무섭고, 나에게 그들과 같은 말들을 할까 무서워. 너는 그러지 않을 거라고 믿고 싶지만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떻게 그걸 확신해. 나는 회의주의자가 아니야. 회의주의자가 되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믿음은 말 한마디로도 쉽게 깨지더라. 유리와는 다르게, 녹여서 붙일 수도 없더라. 그걸 경험으로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제는 너무 늦었다, 그치?
이제 와서 고백하건대, 사실 주소는 핑계야. 엄마가 옛날에 쓰던 폰을 다시 켜보면 너희 엄마의 연락처가 남아 있을 테니까. 아마 나를 기억하고 계실 거야. 너희 집에 자주 갔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기꺼이 네 연락처나 지금 주소를 알려주실 거야. 그럼 나는 이 편지를 뽑아서 부치기만 하면 돼. 하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아. 모든 변명거리를 다 옆으로 치우고 나면 한때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에게 상처받는 게 무서운 나만이 남아. 어릴 때는 멍청하고 착하고, 또 용감했어. 아픔이 뭔지를 몰라서, 그걸 무서워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나는 더 이상 아프고 싶지 않아. 유서에 쓸 법한 말 같지만, 그런 건 아니고, 그저 굳이 상처받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뿐이야. 특히나 너에게는.
어릴 때 나란히 읽던 만화책 속 주인공들처럼, 나 역시 무너짐을 감수해야 할까? 판타지 소설 속 마법사처럼 용기를 내어 일어서야 할까? 잘 모르겠어. 나는 주인공이 아닌걸. 내가 주인공인 이야기를 누가 읽고 싶어 하겠어, 재미도 없는데.
그러니 이 편지를 부치지 않을래.
너에게 나는 영원히 아홉 살에 남아 있어도 돼. 그냥 물고기가 그려진 원피스를 입고 분수대에 들어가 놀던 추억으로 나를 남겨줘. 같이 블록을 쌓고 마법사인 척 역할놀이를 하던 그때의 희미한 기억이면 괜찮아. 열아홉의 나를 너에게 모조리 알릴 필요는 없잖아. 하지만 몇 년 동안 나의 유일한 친구로 남아준 너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선물 하나는 보내고 싶어. 우정 반지라거나, 실 팔찌라거나, 이런 건 아냐. 그런 걸 할 나이는 이제 좀 지났잖아.
대신에 너에게 단어를 하나 선물할게. 형태가 없는 이 선물은 내가 공들여서 포장하고 부칠 필요가 없는 대신 제주까지 단숨에 도착하겠지. 너와 내가 타던 녹슨 줄의 그네와 너와 내가 네임펜으로 남긴 낙서를 거쳐서 네 방 창문까지.
그 단어가 정확히 뭔지는 구태여 말하지 않아. 하지만 이 편지 안에 들어 있어. 그러니 이 편지에서 나머지는 모두 흩어지고, 오직 그 단어만이 너에게 닿길 바랄게. 그리고 언젠가 너와 내가 다시 만나는 날이 온다면, 그것이 신의 뜻이라면, 그때는 지금 내가 못 낸 용기를 내어볼게. 얼굴을 마주한다면 지금보다는 좀 더 대담해질 수 있을지도 몰라. 난 항상 실전에 강한 편이었으니까.
또한 그때의 너 역시 아홉 살이 아닌 열아홉, 혹은 스물아홉, 그 언젠가의 나를 받아들일 수 있기를, 그래서 결국 내 걱정과 두려움은 모두 기우에 불과했기를 바라. 다들 내가 걱정이 너무 많다고 하기는 하더라.
어쨌거나 편지에 끝을 냈네.
그럼, 이만,
유월 초의 저녁에, 너의 친구였던 사람이.
[심사위원 작품평]
심사위원들은 토리아 님이 어린 시절 헤어진 친구에게 닿고 싶은 마음과 닿을까 두려운 마음을 ‘부치지 못한 편지’ 형식으로 담아낸 점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주소를 모른다는 핑계에서 시작해, 상처받는 것이 두려운 자신의 모습까지, 한 겹씩 드러나는 솔직함이 특히 인상적입니다. 신앙을 앞세워 존재를 지우려는 말들 속에서, ‘분명 여기 있는’ 토리아 님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전해집니다. 그리고 끝내 밝히지 않은 단어 하나는 ‘너의 친구였던 사람’이 건네는 가장 다정한 선물로 이 편지에 남아 있습니다.
심사위원 다랴 |
편지를 쓴다고 해서 네가 읽을 거라고 확신하는 건 아니야. 사실, 네가 읽기를 원하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이걸 끝까지 쓸지, 또 이걸 써서 부칠지 말지도 모르겠어. 부칠 수 있기는 할까? 그 아파트 단지를 찾아간다면 너희 집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정확한 주소가 기억나지 않아. 그래, 아마 이 편지를 영원히 부칠 수 없을 거야. 그럼에도 나는 빈 화면을 문장들로 채우고 있어.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편지는 인사와 안부로 시작하지, 아마. 그럼 이렇게 물어볼까. 잘 지내니, 학교생활은 어떠니, 동생이랑 오빠는 어떻게 지내고 교회는 아직도 다니니, 서울 올 일이 생기면 연락하겠다며, 왜 아무 전화가 없어. 또, 너무 어릴 때라서 연락처를 교환하지 못한 게 아쉽네, 나는 그럭저럭 잘 살고 있어, 이런 말도 덧붙이고. 솔직하게 굴고 있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야. 그치만 십 년 만에 너에게 거는 말인데, 우울한 소리만 늘어놓을 수는 없잖아. 그게 예의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아.
십 년 만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네가 알던 나와 지금의 나는 꽤 비슷할 거야. 여전히 키는 평균보다 좀 작은 축이고, 여전히 책 읽는 걸 좋아하고, 여전히 배우가 되고 싶어 해. 더 이상 아홉 살이 아닌 너는 내가 예체능 입시라도 하고 있나 생각하겠지만 그건 아니야. 이상주의자라는 말을 가끔 듣긴 하지만 이제 나는 현실과 타협하는 법을 배웠어. 나는 예쁘지도 않고, 노래를 잘하지도 못하고, 자신감도 없지만 공부는 꽤 해서, 오직 거기에만 매달리는 중이야. 너도 그러고 있으려나, 잘 모르겠다. 아홉 살 때의 너는 어렴풋이 기억하지만, 열아홉 살의 네가 어떤 사람인지, 나는 모르니까. 그리고 그게 나를 무섭게 만들어.
아주 오랫동안, 너는 내가 거리낌 없이 친구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확신을 가지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그리고 그걸 확신하는 순간 기대가 깨져버리는 걸 너무 많이 겪었으니까. 지금 나의 두 친구는 너와 헤어진 그해에 처음 만났는데, 그 애들도 중학생이 될 무렵에야 친구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어. 내가 사람을 너무 못 믿고 매정하다고?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나는 너를 좋아했고, 너도 나를 좋아한다는 확신이 있었다는 거야. 어려서 그랬을까? 잘 모르겠어. 어린이들이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기억이 안 나. 하지만 그때는 내가 지금보다 멍청했다는 걸 알아. 그리고 지금보다 더 착했다는 걸 알아.
내가 무서운 지점은 그거야. 내가 친구라 불렀던 건 과거의 멍청하고 착한 너였고, 네가 친구라고 불렀던 건 과거의 멍청하고 착한 나였는데, 현재의 우리가 서로를 마주한다면 그때는 서로를 더 이상 친구라고 부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야. 단순히 서로를 본 지 너무 오래되어서 그런 게 아니야. 이제는 내가 네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알아서 그래.
아니, 오해는 하지 마. 네가 싫은 것도, 하느님이 싫은 것도 아니야. 나는 하늘에 계신 너와 나의 아버지가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처럼 자애로울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그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항상 그의 말씀을 따르지는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어. 나를 완전히 잘못된 이유로 정신병자라 부르는 사람이 있었어. 물론 그 사람은 내가 옷장 안에 숨겨놓은 무지개 깃발의 존재를 몰랐겠지. 책상 위 펼친 사회문화 수능특강에 나온 젠더라는 단어를 가리키며 거짓말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어. 설명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서 말이야. 그리고 그 사람들은 말했어. 그건 하느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방식이 아니라고. 하지만 나는 분명 여기 있는데. 너와 같은 방식으로 빚어져서 너와 같은 교실을 공유하고, 시험 직전에는 너와 같은 신에게 찍은 문제를 다 맞히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리는데. 내가 아는 신은 너의 이름처럼 은혜로운데.
그래서 네가 지금의 나를 만난다면, 그때와 비슷한 사람인 나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여길까 무섭고, 나에게 그들과 같은 말들을 할까 무서워. 너는 그러지 않을 거라고 믿고 싶지만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떻게 그걸 확신해. 나는 회의주의자가 아니야. 회의주의자가 되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믿음은 말 한마디로도 쉽게 깨지더라. 유리와는 다르게, 녹여서 붙일 수도 없더라. 그걸 경험으로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제는 너무 늦었다, 그치?
이제 와서 고백하건대, 사실 주소는 핑계야. 엄마가 옛날에 쓰던 폰을 다시 켜보면 너희 엄마의 연락처가 남아 있을 테니까. 아마 나를 기억하고 계실 거야. 너희 집에 자주 갔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기꺼이 네 연락처나 지금 주소를 알려주실 거야. 그럼 나는 이 편지를 뽑아서 부치기만 하면 돼. 하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아. 모든 변명거리를 다 옆으로 치우고 나면 한때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에게 상처받는 게 무서운 나만이 남아. 어릴 때는 멍청하고 착하고, 또 용감했어. 아픔이 뭔지를 몰라서, 그걸 무서워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나는 더 이상 아프고 싶지 않아. 유서에 쓸 법한 말 같지만, 그런 건 아니고, 그저 굳이 상처받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뿐이야. 특히나 너에게는.
어릴 때 나란히 읽던 만화책 속 주인공들처럼, 나 역시 무너짐을 감수해야 할까? 판타지 소설 속 마법사처럼 용기를 내어 일어서야 할까? 잘 모르겠어. 나는 주인공이 아닌걸. 내가 주인공인 이야기를 누가 읽고 싶어 하겠어, 재미도 없는데.
그러니 이 편지를 부치지 않을래.
너에게 나는 영원히 아홉 살에 남아 있어도 돼. 그냥 물고기가 그려진 원피스를 입고 분수대에 들어가 놀던 추억으로 나를 남겨줘. 같이 블록을 쌓고 마법사인 척 역할놀이를 하던 그때의 희미한 기억이면 괜찮아. 열아홉의 나를 너에게 모조리 알릴 필요는 없잖아. 하지만 몇 년 동안 나의 유일한 친구로 남아준 너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선물 하나는 보내고 싶어. 우정 반지라거나, 실 팔찌라거나, 이런 건 아냐. 그런 걸 할 나이는 이제 좀 지났잖아.
대신에 너에게 단어를 하나 선물할게. 형태가 없는 이 선물은 내가 공들여서 포장하고 부칠 필요가 없는 대신 제주까지 단숨에 도착하겠지. 너와 내가 타던 녹슨 줄의 그네와 너와 내가 네임펜으로 남긴 낙서를 거쳐서 네 방 창문까지.
그 단어가 정확히 뭔지는 구태여 말하지 않아. 하지만 이 편지 안에 들어 있어. 그러니 이 편지에서 나머지는 모두 흩어지고, 오직 그 단어만이 너에게 닿길 바랄게. 그리고 언젠가 너와 내가 다시 만나는 날이 온다면, 그것이 신의 뜻이라면, 그때는 지금 내가 못 낸 용기를 내어볼게. 얼굴을 마주한다면 지금보다는 좀 더 대담해질 수 있을지도 몰라. 난 항상 실전에 강한 편이었으니까.
또한 그때의 너 역시 아홉 살이 아닌 열아홉, 혹은 스물아홉, 그 언젠가의 나를 받아들일 수 있기를, 그래서 결국 내 걱정과 두려움은 모두 기우에 불과했기를 바라. 다들 내가 걱정이 너무 많다고 하기는 하더라.
어쨌거나 편지에 끝을 냈네.
그럼, 이만,
유월 초의 저녁에, 너의 친구였던 사람이.
[심사위원 작품평]
심사위원들은 토리아 님이 어린 시절 헤어진 친구에게 닿고 싶은 마음과 닿을까 두려운 마음을 ‘부치지 못한 편지’ 형식으로 담아낸 점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주소를 모른다는 핑계에서 시작해, 상처받는 것이 두려운 자신의 모습까지, 한 겹씩 드러나는 솔직함이 특히 인상적입니다. 신앙을 앞세워 존재를 지우려는 말들 속에서, ‘분명 여기 있는’ 토리아 님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전해집니다. 그리고 끝내 밝히지 않은 단어 하나는 ‘너의 친구였던 사람’이 건네는 가장 다정한 선물로 이 편지에 남아 있습니다.
심사위원 다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