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야 안녕. 너를 사랑하게 된 건 2년 전 겨울이었는데, 네가 제일 좋아하는 여름이 되어서야 이렇게 전에 쓴 편지를 꺼내어 세상으로 내어보는 날이 왔네.
전하지 못할 편지글이 공책을 꽉꽉 채우고 있을 때면 늘 슬퍼져. 얻어맞은 듯한 슬픔을 느껴본 적 있어? 내가 이렇게 써봐야 아무도 알아주지 않겠구나, 하고 지금까지 애써 메워왔던 고독의 수문을 누군가 콱, 하고 부숴버리는 느낌이야. 언젠가 너에게 전할 수 있을 거라는 작은 기대에 반듯하게 적어 내려간 글자들이 내 머리 위로 우수수 쏟아져 내려. 새까만 밤하늘에서 유성우가 내리는 것처럼. 유성이 그리는 긴 꼬리가 실은 추락하며 그 한 몸을 다 태워 내는 빛이라는 걸 알아? K, 널 생각하면 울음으로 멍든 검푸른 하늘 아래에서 온몸이 전부 타오르는 것 같아.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지. 아마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은 내가 레즈비언인 걸 알아채지 못할걸. 이런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어. 너무 격정적이고 아름다워서,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실은 동성이라는 게 새삼스럽게 느껴질 만큼의 이야기.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다시 읽어봐야 겨우 레즈비언의 사랑 이야기라는 걸 알아챌 수 있는, 신비스러운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어.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을 때, 우리는 그 둘이 이성애자 커플이라는 걸 크게 의식하지 않잖아. 그저 한 쌍의 연인이 느끼는 치열한 슬픔과, 금지된 분위기에서 피어나는 사랑에 집중하게 될 뿐이지. 세기의 사랑 이야기니까.
이 편지 안에 내 안에서 장미 넝쿨처럼 따갑게 피어나는 세기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싶었어. 주인공인 너에게 전해주고도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용기는 나지 않네. 마음이 지칠 때마다 다시 나는 슬퍼지고 말아. 그렇지만 너의 맑고 까만 눈과 예쁜 코, 입술을 다시 마주하는 때면, 몸 안에 남아있던 크나큰 슬픔은 전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아.
K, 나 사실은 널 사랑하고 있어. 우리 둘 다 여학생이고, 네가 날 사랑해 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확신할 수 있어. 이건 분명히 사랑이라고.
바람이 거세게 부는 때를 가장 사랑해. 너의 짧은 머리칼이 잠시 흩날릴 때 바람이 싣고 오는 네 향기가 좋아서. 또 네가 낮은 목소리로 불러주는 나의 이름 때문에 날 어쩐지 더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잠자코 내 말에 미소 지으며 들려주는 작은 웃음소리에 널 더 사랑하게 돼. 그렇게 매일 내가 정말 널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아가고 있어.
전에 내가 너에게 커밍아웃했을 때, 너는 내가 어떤 지향성을 가지든 존중하겠다고 말해주면서 빙긋 웃었지. 레즈비언이라는 말 하나로 날 다 담기엔 너무 부족하다고 넌 말했어. 나는 웃으면서 고맙다고 했어. 실은 눈물이 흘러내리려는 걸 참으려고 고개를 들었지만. 구름 한 점 없고 해가 쨍하게 내리쬐는 날이었지. 언뜻 눈을 찌르던 빛 한 가닥에는 거짓말처럼 무지개가 비쳤어.
레즈비언 청소년으로 살며 나는 모든 걸 숨기고 싶은 동시에 전부 소리쳐 버리고 싶은 기분을 매일같이 느껴. 결국은 늘 내 정체성을 숨겨버리지만 말이야. 불투명한 막이 세상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것 같기도 해. 그런데 네 앞에 선 나는 한없이 투명해져. 아름다운 네가 빛을 쏟아낼 때 내 몸은 유리 조각처럼 칠색의 빛을 반사하게 돼. 조각난 색깔과 빛깔들을 보며, 내가 이토록 다양한 모습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걸 새삼스럽게 알아가.
너는 늘 내 세계를 넓혀주는 사람이야, K. 내가 사랑하는 너는 무척 다채로운 사람이고, 무지개의 칠색보다 훨씬 더 많은 감정과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야. 영문 모를 폭우 속에서 빛바래고 희미해진 나의 세상에, 너는 선명하게 여러 번 색을 덧칠해 주고 있어. 내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에 울고 웃는지, 어떤 날에 밤을 지새우는지. 나의 정체성, 그리고 나의 세계를 너는 알게 모르게 선물처럼 건네주고 있었던 거야.
너에게 선물처럼 전하고 싶은 단어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사랑해’로 삼행시를 짓는 기분이 들어. 실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만 하고 싶었어. 그런데 일부러 돌아 돌아 온갖 문장들로 내 사랑을 치장하고, 감싸고, 숨기는 거야. 굳이 삼행시를 지어 우스꽝스럽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여자를 좋아하는 나 자신, 이제는 그 애와 눈맞출 수 있을 것 같아. 손을 뻗어서 꼭 잡아줄 수 있을 것 같아. 걱정하지 말라고, 우리에게는 K라는 멋진 친구가 있으니 더 이상 숨지 않아도 좋다고. 또 다른 나와 함께 밝은 내일을 향해서 발걸음을 디뎌볼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눈꺼풀 안에서 꿈꿔온 어두컴컴한 사랑이 단지 ‘동성애’라는 틀로만 불리지 않고, 눈을 뜨면 똑바로 마주할 수 있는 그런 내일들로. K야, 네가 수없이 많은 내일들에 계속 있어 줬으면 해.
사랑한다는 말, 이렇게나 기쁘고 아름다운 말을 해볼까. 난생처음 소녀와 사랑에 빠져버린 소녀의 기분으로. 오롯이 나의 기분으로. 이제는 한 단어로 말해볼까.
너에게 선물하고 싶었던 딱 한 단어. ‘세계’
너에게 온 세계를 다 주고 싶어. 너의 손짓 하나에 간지럽게 꽃을 피우고 눈짓 하나에 파도가 치는 나만의 세계에 널 초대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은 사람과 마음껏 사랑하고, 당당히 퀴어라고 외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으로.
불가능이란 없이 별도 딸 수 있고 달도 딸 수 있는, 내가 널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세계. 내가 그린 내 세계에 어서 와, K. 정말 사랑해.
[심사위원 작품평]
존재를 통해 숨어 있던 '또 다른 나'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는 성장의 순간이 무척 가슴 뭉클합니다. '사랑해'라는 말을 온갖 문장으로 돌려 전하다 마침내 '온 세계를 주고 싶다'고 고백하는 당당함은 눈부시게 찬란합니다. 불투명한 막을 깨고 나와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포용하게 된 해나님의 눈부신 선언에 깊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심사위원 우재 |
K야 안녕. 너를 사랑하게 된 건 2년 전 겨울이었는데, 네가 제일 좋아하는 여름이 되어서야 이렇게 전에 쓴 편지를 꺼내어 세상으로 내어보는 날이 왔네.
전하지 못할 편지글이 공책을 꽉꽉 채우고 있을 때면 늘 슬퍼져. 얻어맞은 듯한 슬픔을 느껴본 적 있어? 내가 이렇게 써봐야 아무도 알아주지 않겠구나, 하고 지금까지 애써 메워왔던 고독의 수문을 누군가 콱, 하고 부숴버리는 느낌이야. 언젠가 너에게 전할 수 있을 거라는 작은 기대에 반듯하게 적어 내려간 글자들이 내 머리 위로 우수수 쏟아져 내려. 새까만 밤하늘에서 유성우가 내리는 것처럼. 유성이 그리는 긴 꼬리가 실은 추락하며 그 한 몸을 다 태워 내는 빛이라는 걸 알아? K, 널 생각하면 울음으로 멍든 검푸른 하늘 아래에서 온몸이 전부 타오르는 것 같아.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지. 아마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은 내가 레즈비언인 걸 알아채지 못할걸. 이런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어. 너무 격정적이고 아름다워서,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실은 동성이라는 게 새삼스럽게 느껴질 만큼의 이야기.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다시 읽어봐야 겨우 레즈비언의 사랑 이야기라는 걸 알아챌 수 있는, 신비스러운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어.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을 때, 우리는 그 둘이 이성애자 커플이라는 걸 크게 의식하지 않잖아. 그저 한 쌍의 연인이 느끼는 치열한 슬픔과, 금지된 분위기에서 피어나는 사랑에 집중하게 될 뿐이지. 세기의 사랑 이야기니까.
이 편지 안에 내 안에서 장미 넝쿨처럼 따갑게 피어나는 세기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싶었어. 주인공인 너에게 전해주고도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용기는 나지 않네. 마음이 지칠 때마다 다시 나는 슬퍼지고 말아. 그렇지만 너의 맑고 까만 눈과 예쁜 코, 입술을 다시 마주하는 때면, 몸 안에 남아있던 크나큰 슬픔은 전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아.
K, 나 사실은 널 사랑하고 있어. 우리 둘 다 여학생이고, 네가 날 사랑해 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확신할 수 있어. 이건 분명히 사랑이라고.
바람이 거세게 부는 때를 가장 사랑해. 너의 짧은 머리칼이 잠시 흩날릴 때 바람이 싣고 오는 네 향기가 좋아서. 또 네가 낮은 목소리로 불러주는 나의 이름 때문에 날 어쩐지 더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잠자코 내 말에 미소 지으며 들려주는 작은 웃음소리에 널 더 사랑하게 돼. 그렇게 매일 내가 정말 널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아가고 있어.
전에 내가 너에게 커밍아웃했을 때, 너는 내가 어떤 지향성을 가지든 존중하겠다고 말해주면서 빙긋 웃었지. 레즈비언이라는 말 하나로 날 다 담기엔 너무 부족하다고 넌 말했어. 나는 웃으면서 고맙다고 했어. 실은 눈물이 흘러내리려는 걸 참으려고 고개를 들었지만. 구름 한 점 없고 해가 쨍하게 내리쬐는 날이었지. 언뜻 눈을 찌르던 빛 한 가닥에는 거짓말처럼 무지개가 비쳤어.
레즈비언 청소년으로 살며 나는 모든 걸 숨기고 싶은 동시에 전부 소리쳐 버리고 싶은 기분을 매일같이 느껴. 결국은 늘 내 정체성을 숨겨버리지만 말이야. 불투명한 막이 세상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것 같기도 해. 그런데 네 앞에 선 나는 한없이 투명해져. 아름다운 네가 빛을 쏟아낼 때 내 몸은 유리 조각처럼 칠색의 빛을 반사하게 돼. 조각난 색깔과 빛깔들을 보며, 내가 이토록 다양한 모습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걸 새삼스럽게 알아가.
너는 늘 내 세계를 넓혀주는 사람이야, K. 내가 사랑하는 너는 무척 다채로운 사람이고, 무지개의 칠색보다 훨씬 더 많은 감정과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야. 영문 모를 폭우 속에서 빛바래고 희미해진 나의 세상에, 너는 선명하게 여러 번 색을 덧칠해 주고 있어. 내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에 울고 웃는지, 어떤 날에 밤을 지새우는지. 나의 정체성, 그리고 나의 세계를 너는 알게 모르게 선물처럼 건네주고 있었던 거야.
너에게 선물처럼 전하고 싶은 단어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사랑해’로 삼행시를 짓는 기분이 들어. 실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만 하고 싶었어. 그런데 일부러 돌아 돌아 온갖 문장들로 내 사랑을 치장하고, 감싸고, 숨기는 거야. 굳이 삼행시를 지어 우스꽝스럽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여자를 좋아하는 나 자신, 이제는 그 애와 눈맞출 수 있을 것 같아. 손을 뻗어서 꼭 잡아줄 수 있을 것 같아. 걱정하지 말라고, 우리에게는 K라는 멋진 친구가 있으니 더 이상 숨지 않아도 좋다고. 또 다른 나와 함께 밝은 내일을 향해서 발걸음을 디뎌볼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눈꺼풀 안에서 꿈꿔온 어두컴컴한 사랑이 단지 ‘동성애’라는 틀로만 불리지 않고, 눈을 뜨면 똑바로 마주할 수 있는 그런 내일들로. K야, 네가 수없이 많은 내일들에 계속 있어 줬으면 해.
사랑한다는 말, 이렇게나 기쁘고 아름다운 말을 해볼까. 난생처음 소녀와 사랑에 빠져버린 소녀의 기분으로. 오롯이 나의 기분으로. 이제는 한 단어로 말해볼까.
너에게 선물하고 싶었던 딱 한 단어. ‘세계’
너에게 온 세계를 다 주고 싶어. 너의 손짓 하나에 간지럽게 꽃을 피우고 눈짓 하나에 파도가 치는 나만의 세계에 널 초대하고 싶어. 사랑하고 싶은 사람과 마음껏 사랑하고, 당당히 퀴어라고 외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으로.
불가능이란 없이 별도 딸 수 있고 달도 딸 수 있는, 내가 널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세계. 내가 그린 내 세계에 어서 와, K. 정말 사랑해.
[심사위원 작품평]
존재를 통해 숨어 있던 '또 다른 나'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는 성장의 순간이 무척 가슴 뭉클합니다. '사랑해'라는 말을 온갖 문장으로 돌려 전하다 마침내 '온 세계를 주고 싶다'고 고백하는 당당함은 눈부시게 찬란합니다. 불투명한 막을 깨고 나와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포용하게 된 해나님의 눈부신 선언에 깊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심사위원 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