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무지개백일장 수상작

나다움상살아가는 = 사랑하는 / 유노, 2008년생

“사랑한다는 건 곧, 살아간다는 뜻이고, 살아간다는 건 곧, 사랑한다는 뜻이다.”

 내가 한 말이다.

 난 살아 있는 사람이 좋다. 죽어 있는 사람을 좋아하기에는 너무 지쳤다. 장국영과 데이비드 보위, 내 생일날 자살 기도를 하고 이별을 통보한 전 애인과 이곳이 아닌 어딘가에 진정한 자신이, 행복이 있을 거라 희망하며 삶을 회피하는, 죽지 않았더라도 죽어 있는 사람들. 나는 내 주위의 살아 있는 사람들을 보며 살아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싶어졌다. 마누라 한 명 끼고 건실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적당한 정상성 수행과 적당한 엽기 인생의 변곡선을 지나가며 살아가는 내 주위 퀴어 ‘어른’들과 퀴어 재현을 지속적으로 하는 작가님 몇 분과 독립 언론사 대표님, 공방 작가님, 예술가 몇 분, 활동가 몇 분, 대학생 몇몇과 사회 초년생 직장인, 그냥 직장인까지. 저마다의 삶을 놓치지 않고 이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살아 있음과 사랑하는 것을 배워나가고 있다.


 여자아이가 설탕과 향신료 그 외의 근사한 것들과 가부장제의 억압, 사상 검증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나는 수향미(米) 한 가마와 구황작물, 퀴어이자 촌놈이라는 정체성, 그 외에도 불심이 가득하지는 않지만 불자로서 비워내고 수행하는 삶을 추구하는 마음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 얼기설기 엮어진 관계의 거미줄을 허물어버린다면, 지금까지 형성되고 구성된 것들이 사라진다면 더 이상 나는 ‘나’가 아니게 될 것이다. 그날 띵동에서 언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크리스마스에 나 홀로 집회에 가지 않았더라면, 상담소에서 진행하는 퀴어 에세이 워크숍에 참석하지 않았더라면, 퀴퍼를 가지 않았더라면, 그날 같은 공연을 보지 않았더라면, 퀴어 당사자의 훌라댄스 원데이 클래스를 듣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나’가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퀴어가 아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인연들을 떠올리면 내가 퀴어라는 사실에 감사하다. 그들과 지금까지 긴밀한 교류를 나누는 건 퀴어라는 것 이외에도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이지만 내가 퀴어가 아니었다면 그들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니. 내가 퀴어이기에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 중 퀴어 ‘어른’들이 내 곁에 있어 마음이 놓일 때가 있다. 텔레비전으로만 접하던 홍석천, 하리수가 아닌 나와 같은 소시민인 퀴어 ‘어른’들. “유노 님이 08년생이시라고요? 제가 08학번인데!?”, “제가 만약 대학생 때 노력했다면 지금쯤 유노 님만 한 아이가 있겠네요.”(그렇지만 작가님은 레즈비언이시잖아요. 뭘 그 시절 그 나이에 레즈비언 임출육을 하실 생각을….) 같은 말들이 나올 정도로 나이 차가 나는 편이지만 어찌저찌 이쁨받으며 관계가 형성이 되었다. 그 ‘어른’ 들을 보며 이렇게 살아도 살아지는구나, 퀴어로 살아도 ‘어른’이 될 수 있구나, 늙어갈 수 있구나, 살아갈 수 있구나, 라는 안도를 느낀다. 어른은 아니어도 항상 내 앞에서만큼은 내 연하 롤 수행을 받아주기 위해 연상 롤을 수행하며 나를 챙기려 드는 두세 살 많은 친구들 덕에 사랑받음을 느낀다. 

 또, 그들은 나와는 다르게 살아 있다. 꿈이 있다는 말이다. 나의 허황된, 쇠똥 냄새 나는 노스탤지어. 그놈의 디아스포라 때문에 논두렁 같은 향수에서 질퍽질퍽 질척질척거리는 나의 꿈(학교 진로 시간에 적어내는 장래 희망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다. “내게도 꿈은 있습니다. 마누라 끼고 제 고향으로 귀농해서 마당 외양간에서 소 한 마리 키우는 그런 지극히 평범하고 평탄한, 정상성을 추구하는, “안온한 밤 보내세요.”가 절로 나오는 일상을 보내고 싶습니다.”)과는 다른 ‘꿈’ 말이다. 그들은 모두 분명한 목표라는 지향점이 있고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숨을 쉬며 나아가고 있다. 그들을 볼 때 살아 있는 사람을 본다.


 말만이라도 원망하는 부처님께서 나를 남자로 태어나게 해달라는 불심 깊으신 고조할머니의 기도를 딱 잘라 절반이나 들어주신 덕분에 이런 반쪽짜리로 태어난 걸 감사하게 여기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어렸을 때, 그 나이에 뭘 알았겠냐만, 자기 전에 늘 기도했다. 부처님에게 하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알라나 예수님, 하느님에게 한 것도, 조상신에게 기도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아무나 내 기도를 들어주길 원했다. 매일 밤마다. “다음 날 눈을 뜨면 완전한 남자로 변하게 해주세요. 남들처럼 평범하게요. 사실,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어요.” 그 기도를 마치고 내 머리맡의 인형 두 개와 고향에 계신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좋은 잠을 취하라는 인사를 마치면 눈을 감았다. 이제는 그런 기도를 하지도 않는다. 사찰에 가서 부처님에게 인사드릴 때도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해방과 나의 사사로운 바람들(대입이나 올해 농사 잘되게 해주세요 같은)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다(사실은 내 사사로운 바람을 앞에 두었다. 공양을 먹을 때 내가 너무 싫어졌다). 

 이제는 나를 남자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불경을 외시던 고조할머니를 용서하게 되었다. 내가 권력을 가지고 태어나기를 바라셨다고 내 멋대로 짐작할 뿐이다(그렇게 남자가 좋으시면 본인이 남자 하시지. 왜 나더러 남자로 태어나라고 하셨는지. 방금 용서했다기에는 아직 감정이 남아 있는 듯하다). 원수를 용서하라던 말과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한 성인의 말씀이 어째서인지 같은 말씀으로 느껴진다. 결국 사랑하라는 말이다. 나는 고조할머니를 사랑하나 보다.


 지금은 내가 배워온 것을 나누고 있다. 사랑을 하고 있다. 머리를 짧은 단발로 자르고 온 같은 반의 그 애와 눈이 맞아 정분이 나버렸다. (나는 역시 짧은 머리에 느끼나 보다. 최악이다. 그렇지만, 그 애도 짧은 머리로 자른 날 보며 느꼈다. 둘 다 최악.) 매일같이 사랑한다고 말하고 입을 맞춘다. 시도 때도 없이 껴안고 몸을 밀착하지만 학교에서 대충 오픈리 퀴어인 나를 바라보는 편견 덕에, 우리의 관계성은 오직, 우리 둘만이 사유하는 비밀이 되었다(설령 우리의 관계가 우리만의 것이 아니게 되더라도 표면상 헤테로 커플처럼 보일 뿐 정상성과는 동떨어진 관계이다). 

 내 몸 위에 앉은, 40kg조차 되지 않는 것같이 가녀린 그 애의 무게가 느껴지면 묘한 안전감과 평온함이 찾아온다. 상토 40L의 무게를 견디며 운반하던 때와는 다른 감상이다. 그 애의 몸에 몸을 맞닿은 채 앉아 있고, 누워 있으면 그 애의 호흡이, 심장 고동이 내 몸 안을 채운다. 우리의 호흡은 박자를 맞추어 이내, 일정해지고 우리의 맥박은 동일해진다. 하나가 되어가는 것 같다. 사랑을 느끼고 살아 있음을 느낀다. 그 애의 호흡과 박동으로 내가 숨을 쉰다는 것을, 박동하고 열망한다는 것을 느낀다. 열망하고 열망당하는 기브 앤 테이크가 이루어진다. 사랑한다는 건 살아 있다는 것 같다. 춤추지 않은 날은 허비한 날이라는 것처럼 사랑하지 않는 삶은 무가치한 것 아닐까. (너무 유성애적 생각인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유성애자인걸. 사람은 자신의 식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는 영화 〈헤드윅〉을 통해 내 자아라는 광명을 보았고, 〈패왕별희〉를 통해 거세된, 어쩌면 스스로 거세한 내 남성성, 즉 구조적 특권층의 권력에 대한 양가적 감정을, 그러니까 역겨움과 동시에 원래는 내 것이었을, 내가 놓쳐버린, 놓아버린 그것에 대한 결핍을 느꼈으며, 〈로봇 드림〉에서는 지나간 인연을 떠나보내는 것 또한 사랑임을,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는 내가 느끼던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으로서의 감각을, 〈세계의 주인〉에서는 나조차 인지하지 못하던 내 안의 나이브함을 깨달았다. 이 영화들을 보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나’가 아니겠지. 뮤지컬 〈렌트〉에서는 내가 늘 말하고 다니는, 주저하지 않는 지나간 어제와 어쩌면 오지 않을 내일을 잊은 채 오직, 오늘만을 노래하며 사랑하는(=살아가는) 것을 새겼다. 이 극을 보지 않았더라면 지금 내가 살아 있을까?


 우리에게 늘 삶을 놓치라고 종용하는 부조리에게 반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살아가는 것이다. 삶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과 살아가는 것은 같은 의미이니 사랑해야 한다. 살아야 한다. 내가 받아온 삶들을, 그 사랑들을 위해서라도 살아가야 한다. 사랑해야 한다.

 “사랑한다는 건 곧, 살아간다는 뜻이고, 살아간다는 건 곧, 사랑한다는 뜻이다.”

 이 말 또한 내가 살아가기 위해, 사랑하기 위해 되풀이한 연습들 중 하나이다.

 지금도 연습 중이다. 살아가기 위해, 사랑하기 위해. 둘은 같은 의미니. 동의어 반복인 셈이다.



[심사위원 작품평] 


<살아가는=사랑하는>은 단 한 문장도 관습에 기대지 않고 글쓴이만의 뚜렷한 기세와 개성을 담아낸 글입니다. 지금껏 지나쳐온 인연들과 고유한 일상의 조각들이 ‘나’라는 사람을 이루고 있다는 단단한 인식 위로, 특유의 재치와 입담이 유쾌하게 흐릅니다. 이러한 활기의 바탕에는 삶 자체를 기꺼이 예찬할 수 있게 된 유노 님의 눈부신 성장이 깔려 있습니다. 때로 죽음이란 것이 너무도 가까운 듯 보이는 이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곧 사랑하는 것”이라 선언하는 자긍심 넘치는 목소리가 깊고 진한 울림을 남깁니다. 앞으로도 자신만의 선명한 언어로 삶을 긍정해 나갈 유노 님의 빛나는 내일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심사위원 수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