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게 꽃이 아닌, 화분 하나를 건네기로 했다.
사람은 이별한 뒤에도 누군가에게 무언가 건넬 수 있을까. 오래 닫아두었던 서랍을 정리하듯 긴 고민을 삼킨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화려하게 피어났다 이내 시들어버릴 꽃송이가 아니라, 단단하고 오래 너를 잡아줄 화분을 네 손에 쥐여주고 싶었다. 꽃은 결국 소멸을 향해 가지만 화분은 언제든 새로운 생명을 다시 심을 수 있으니.
우리가 처음 만나기로 했던 4월,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섣부르게 건넸던 나의 고백에 너는 얼떨결에 내 손을 잡아주었다. 하지만 세상의 시선 속에서 타인에게 들키지 말아야 할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열넷의 우리에게 너무나도 무거운 짐이었다. “이건 아닌 것 같아, 내가 널 사랑하는지 모르겠어. 힘들어.” 네가 울먹이며 이별을 말했을 때, 나는 기다리겠다는 말을 전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시간은 비밀스럽고도 신기했다. 멀어진 줄 알았던 네 마음에 다시 나를 향한 감정이 자라나게 되었고, 우리가 다시 손을 잡게 되었을 때 나는 다시 한번 너를 내게 새겼다. 두 번째 시작은 달랐다.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세계였기에, 우리는 온 세상을 적으로 돌리더라도 서로만큼은 다치지 않게 하려고 눈물겨울 정도로 서로를 아끼고 보듬었다. 사람들 틈에서 내 이름을 비밀스럽게 부르는 네 목소리에 사랑이 가득했을 때, 나는 우리가 온 세상의 눈을 피해 오래도록 같은 계절을 걸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야속하게도 계절보다 먼저 변한다. 시간이 흐르며 우린 고등학교 입시로 각자의 일상이 바빠졌고, 마주 앉아도 어느 순간부터 대화는 겉돌며 말이 통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도 숨이 막히는 현실의 무게 속에서 서로를 가장 아끼던 마음은 역설적으로 서로를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족쇄가 되어갔다. 그리고 너를 향한 내 마음 역시 조금씩 식어가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그 균열을 애써 모른 척했다. 세상의 벽 앞에서 사랑이 식었다는 말은 너무 잔인했고, 여전히 너만을 바라본다는 말은 점점 나 자신을 속이는 거짓이 되어갔으니까. 결국 우리는 서로를 붙잡는 대신, 가장 아픈 곳을 찌르며 상처 입히기 시작했다. 치열하게 다투는 것이 여전히 사랑하기 때문이라 믿고 싶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세상에 내던져진 사랑을 잃어가던 두 사람이, 차마 다가온 끝을 인정하지 못해 미루고 있었던 처절한 몸부림이었을 뿐이다.
이별은 예상보다 담담하고 조용했다. 그러나 정적을 깨고 내 안에서 자라난 것은 수많은 후회의 문장들이었다. 미안했다. 세상에 상처받지 않으려 구석에 숨어 있던 너를 햇살로 이끌어 나를 사랑하게 만든 것도 나였고, 두 번째 기적처럼 찾아온 그 마음을 끝까지 품고 안아주지 못한 채 도망친 사람도 나였다. 내 마음이 먼저 무뎌졌다는 부채감은 시간이 흘러 주위의 시선이 희미해진 뒤에도 가슴 깊은 곳에 앙금처럼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네게 금방 꺾여버릴 꽃다발 대신 화분을 선물하고 싶다. 우리가 함께했던 그 계절을 ‘절망’이라는 어두운 단어로 박제해두지 않기를 바라서. 세상의 편견과 싸우며 버텨온 우리의 시간이 ‘후회’라는 이름으로 변색되지 않기를 바라서. 그리고 눈물을 자주 흘리는 네가 매일 눈물로 이별의 슬픔을 키우지 않기를 바라서이다.
비어 있는 화분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거대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 흙은 한 계절의 꽃이 지고 난 뒤에도 묵묵히 다음 계절의 숨결을 준비한다. 나는 우리의 서툴고 치열했던 시간이 너를 메마르게 만든 겨울이 아니라, 네 삶에 찾아올 또 다른 아름다운 계절을 기다리는 영양 가득한 흙이었으면 좋겠다. 혹시 나와의 기억이 다시 찾아와 너를 울리더라도 그 눈물이 상처로 남지 않고 네 내면의 새로운 뿌리를 적시는 단비가 되길.
그리하여 네가 언젠가 또 다른 사랑을 마주하게 되는 날에는 나로 인해 겪었던 아픔 때문에 사랑 앞에 망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음번에는 세상의 눈치 따위 보지 않고 끝까지 온전히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를, 다가온 행복을 의심하지 않고 온몸으로 껴안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가 너에게 선물하고 싶은 마지막 단어는 화분이다. 꽃을 피워내는 것은 결국 온전히 네 몫이겠지만, 나는 다만 네 삶의 모퉁이에 작은 흙 한 줌을 남겨두고 떠난 사람이고 싶다. 그 위에서 언젠가 네가 피워낼 꽃의 이름은 결코 슬픔이 아닌 찬란한 희망일 것이라 믿는다.
[심사위원 작품평]
‘사랑’이라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과 이별한 경험을 독창적인 비유와 차분하고 평온한 문체로 이야기한 24님의 글을 통해, 사랑은 상대방이 성장하기를 바라는 관심이기도 하다는 점을 배웁니다. 사랑했던 사람이 그의 삶에 찾아올 또 다른 아름다운 사랑을 품을 수 있도록 비어 있는 화분을 그에게 주고 싶다는 24님. 그런 24님도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고 상대방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기를, 다가올 행복을 온몸으로 껴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심사위원 오세진 |
나는 네게 꽃이 아닌, 화분 하나를 건네기로 했다.
사람은 이별한 뒤에도 누군가에게 무언가 건넬 수 있을까. 오래 닫아두었던 서랍을 정리하듯 긴 고민을 삼킨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화려하게 피어났다 이내 시들어버릴 꽃송이가 아니라, 단단하고 오래 너를 잡아줄 화분을 네 손에 쥐여주고 싶었다. 꽃은 결국 소멸을 향해 가지만 화분은 언제든 새로운 생명을 다시 심을 수 있으니.
우리가 처음 만나기로 했던 4월,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섣부르게 건넸던 나의 고백에 너는 얼떨결에 내 손을 잡아주었다. 하지만 세상의 시선 속에서 타인에게 들키지 말아야 할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열넷의 우리에게 너무나도 무거운 짐이었다. “이건 아닌 것 같아, 내가 널 사랑하는지 모르겠어. 힘들어.” 네가 울먹이며 이별을 말했을 때, 나는 기다리겠다는 말을 전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시간은 비밀스럽고도 신기했다. 멀어진 줄 알았던 네 마음에 다시 나를 향한 감정이 자라나게 되었고, 우리가 다시 손을 잡게 되었을 때 나는 다시 한번 너를 내게 새겼다. 두 번째 시작은 달랐다.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세계였기에, 우리는 온 세상을 적으로 돌리더라도 서로만큼은 다치지 않게 하려고 눈물겨울 정도로 서로를 아끼고 보듬었다. 사람들 틈에서 내 이름을 비밀스럽게 부르는 네 목소리에 사랑이 가득했을 때, 나는 우리가 온 세상의 눈을 피해 오래도록 같은 계절을 걸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야속하게도 계절보다 먼저 변한다. 시간이 흐르며 우린 고등학교 입시로 각자의 일상이 바빠졌고, 마주 앉아도 어느 순간부터 대화는 겉돌며 말이 통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도 숨이 막히는 현실의 무게 속에서 서로를 가장 아끼던 마음은 역설적으로 서로를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족쇄가 되어갔다. 그리고 너를 향한 내 마음 역시 조금씩 식어가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그 균열을 애써 모른 척했다. 세상의 벽 앞에서 사랑이 식었다는 말은 너무 잔인했고, 여전히 너만을 바라본다는 말은 점점 나 자신을 속이는 거짓이 되어갔으니까. 결국 우리는 서로를 붙잡는 대신, 가장 아픈 곳을 찌르며 상처 입히기 시작했다. 치열하게 다투는 것이 여전히 사랑하기 때문이라 믿고 싶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세상에 내던져진 사랑을 잃어가던 두 사람이, 차마 다가온 끝을 인정하지 못해 미루고 있었던 처절한 몸부림이었을 뿐이다.
이별은 예상보다 담담하고 조용했다. 그러나 정적을 깨고 내 안에서 자라난 것은 수많은 후회의 문장들이었다. 미안했다. 세상에 상처받지 않으려 구석에 숨어 있던 너를 햇살로 이끌어 나를 사랑하게 만든 것도 나였고, 두 번째 기적처럼 찾아온 그 마음을 끝까지 품고 안아주지 못한 채 도망친 사람도 나였다. 내 마음이 먼저 무뎌졌다는 부채감은 시간이 흘러 주위의 시선이 희미해진 뒤에도 가슴 깊은 곳에 앙금처럼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네게 금방 꺾여버릴 꽃다발 대신 화분을 선물하고 싶다. 우리가 함께했던 그 계절을 ‘절망’이라는 어두운 단어로 박제해두지 않기를 바라서. 세상의 편견과 싸우며 버텨온 우리의 시간이 ‘후회’라는 이름으로 변색되지 않기를 바라서. 그리고 눈물을 자주 흘리는 네가 매일 눈물로 이별의 슬픔을 키우지 않기를 바라서이다.
비어 있는 화분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거대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 흙은 한 계절의 꽃이 지고 난 뒤에도 묵묵히 다음 계절의 숨결을 준비한다. 나는 우리의 서툴고 치열했던 시간이 너를 메마르게 만든 겨울이 아니라, 네 삶에 찾아올 또 다른 아름다운 계절을 기다리는 영양 가득한 흙이었으면 좋겠다. 혹시 나와의 기억이 다시 찾아와 너를 울리더라도 그 눈물이 상처로 남지 않고 네 내면의 새로운 뿌리를 적시는 단비가 되길.
그리하여 네가 언젠가 또 다른 사랑을 마주하게 되는 날에는 나로 인해 겪었던 아픔 때문에 사랑 앞에 망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음번에는 세상의 눈치 따위 보지 않고 끝까지 온전히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를, 다가온 행복을 의심하지 않고 온몸으로 껴안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가 너에게 선물하고 싶은 마지막 단어는 화분이다. 꽃을 피워내는 것은 결국 온전히 네 몫이겠지만, 나는 다만 네 삶의 모퉁이에 작은 흙 한 줌을 남겨두고 떠난 사람이고 싶다. 그 위에서 언젠가 네가 피워낼 꽃의 이름은 결코 슬픔이 아닌 찬란한 희망일 것이라 믿는다.
[심사위원 작품평]
‘사랑’이라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과 이별한 경험을 독창적인 비유와 차분하고 평온한 문체로 이야기한 24님의 글을 통해, 사랑은 상대방이 성장하기를 바라는 관심이기도 하다는 점을 배웁니다. 사랑했던 사람이 그의 삶에 찾아올 또 다른 아름다운 사랑을 품을 수 있도록 비어 있는 화분을 그에게 주고 싶다는 24님. 그런 24님도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고 상대방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기를, 다가올 행복을 온몸으로 껴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심사위원 오세진